커피를 내리며 만난 청년
한 집 건너 커피숍이 즐비한 우리나라는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세계 2위인 커피 공화국이다. 그래서인지 여름철 오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든 사람들을 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는 촌스럽게도 커피 맛을 모른다. 원액에 물을 희석해 마시는 아메리카노보다 다방 커피라 불리는 믹스커피가 입맛에 맞아 하루 한 잔 정도 마시는 편이다.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한 믹스커피를 마시냐고 하는데 각자 취향 나름 아닐까. 달달하고 고소함이 황금비율로 잘 배합된 믹스커피로 하루를 열면 남은 시간도 인생의 쓴 맛없이 잘 풀리리라는 예감이 든다.
커피의 유래는 칼디(kaldi. 9세기), 에디오피아 목동에 의해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염소들이 빨간 열매를 먹은 날은 지치지 않고 날뛰는 걸 보고 커피 열매의 존재와 효능을 처음 알아냈다고 한다.
커피 맛도 모르는 내가 어쩌다 바리스타 과정을 배우게 됐다. 태평양을 건너온 원두를 그라인드하고 포터필터에 원두 가루를 채워 패킹한 후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과정을 배웠다. 에스프레소를 기본 베이스로 우유나 초콜릿, 바닐라 시럽 등을 넣어 다양한 맛을 낸다.
나는 실습 과정에서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개인용 텀블러에 비우고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을 입에 떨어뜨려 맛보곤 했다. 한 방울의 위력도 만만치 않다. 입안 가득 향미가 퍼지는데 커피 애호가들이 말하는 깔끔한 맛이 이런 건가 싶다. 커피 고유의 향미가 입안의 텁텁함을 앗아가 개운했다. ‘뒤끝을 정리해 주는 맛’이랄까. 식후에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커피는 사람들을 연결한다. 커피숍에 앉아있는 대부분은 누구랑 같이 있다. 물론 노트북을 펴 들고 업무를 처리하거나 책을 읽는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보통 삼삼오오 무리 지어 소통하는 이들이 많다. 가장 편안하고 쾌적한 장소에서 낮게 흐르는 음악과 커피 한 잔의 여유는 각박한 현대인에게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 후 도서관에 있는 북카페에서 커피 내리는 봉사를 시작했다. 주문하러 다가오는 손님과 눈인사를 하고 “커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를 말하며 단골들의 얼굴을 익혔다.
그중 훤칠한 키에 하얗고 앳된 얼굴의 깔끔한 청년이 있다. 그는 항상 혼자 와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투 샷을 주문한다. 북카페의 메뉴는 총 세 종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뜨거운 아메리카노, 까페라떼인데 도서관을 이용하는 분에게 무료로 제공해 드린다. 기본 원 샷을 드리는데 투 샷을 원할 경우 그렇게도 해 드린다.
한번은 청년이 오길래 “아아 투 샷이죠? 친구랑 같이 오면 심심하지 않을 텐데...” 라고 하니 “괜찮아요” 하며 쿨하게 받아 마시고 자리를 떴다. 그 뒤 청년은 주문하면서 묻지도 않는 말을 네게 했다. 자격증을 공부하는 중이라고. 나는 그러냐며 공부하다 말고 잠이 오거나 집중이 안 되면 커피 마시러 다시 들르라고 했다.
청년은 하루에 두 번 들를 때도 있었다. 자연스레 스몰톡을 하면서 나이가 몇 살인지 현재 처한 상황과 고민을 알게 됐다. 이십 대 중반의 앳된 청년은 처음보단 핼쑥해진 얼굴로 취직이 안 된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는 도움이 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본의 아니게 무면허 상담사가 되어 그의 고민을 경청했다.
서류전형을 통과하면 면접이 중요한데 질문을 받으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지 말고 심사위원이 듣고 싶은 말을 하라고 조언했다. 심사위원의 의중을 짧은 시간에 캐치하는 분별력과 순발력은 책을 많이 읽으면 도움이 된다고 말하려다 어쩐지 선을 넘는 오지랖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일개 커피를 추출하고 제공하는 바리스타일 뿐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어 솔루션을 제시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대기업에 지원해 여러 번 떨어진 그는 집에서 중소기업에라도 취직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눈을 낮출 수 없다고 자신이 아깝다는 생각에 선뜻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대기업에 잘 다니고 있는 친구들과 비교하니 자존심이 상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다.
어느 날이었다. 좀 전에 다녀간 청년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얼떨결에 “또 왔어요?” 하며 반겼다. 청년은 이번엔 커피를 마시러 오지 않은 듯했다. 주문은 하지 않고 “저는 언제쯤 취업이 될까요?”라며 취업난의 고충을 털어놨다. 이십 분 정도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다리 아플 텐데 테이블에 앉아서 쉬라고 하자, 청년은 괜찮다며 얘기를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음고생이 심한 듯했다. 마른 입술의 살갗이 하얗게 보푸라기처럼 일어나 가끔 침으로 축이며 물었다. 경기가 언제쯤 풀릴지 그때쯤엔 취직할 수 있을지 미래가 암담하다며 내면에 쌓아 둔 고민을 보따리 풀 듯 들춰냈다.
나는 매번 떨어지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지원서를 내보는 것밖에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꾸준히 계속 이력서를 넣다 보면 그중에 운이 작용해 걸릴 확률이 높지 않겠냐는 뻔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집주변 편의점에라도 알바를 구해 용돈을 스스로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에 틈틈이 직장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거라고 했다.
내 얘기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아버지나 직장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 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자 청년은 아니라고 자신에게 내 얘기가 도움 된다고 받아쳤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바리스타가 시청에 직업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 있으니, 전문가와 상담 후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알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어떠냐고 거들었다. 청년은 그렇게 해 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커피 맛을 모르는 내가 커피를 내리면서 우리 삶에 스며든 다양한 얘기를 접하며 음미하기 시작했다. 혀의 모든 부분에 닿아 제각각의 맛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는 에스프레소. 미니어처처럼 생긴 이 작은 한잔에 우리 인생이 농축되어 있는 듯하다.
신맛,단맛,쓴맛,짠맛.
커피의 기본적인 4가지 맛이 서로 튀지 않고 잘 어울릴 때 독특한 향을 지닌 본연의 맛이 우러난다. 우리 삶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맞추고 조율하다 보면 개인의 향과 고유의 빛깔을 담은 서사가 나오지 않을까. 청년이 고민을 덜어내고 결핍을 채우며 균형을 맞춰 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