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에서
겁이 많아요. … 겁이 많다는 표현은 조금 윤색된 것 같습니다. ‘좀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습관적으로 세상의 모든 부담이 나의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죠.
“글쎄, 난 좀 겁이 많은 편인가 봐.”
사실 그렇습니다. 좀스러우면 좀 어떤가요. 세상에 부담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인생의 도처에 널린 부담이 내 것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죠.
그래서 저는 가만히 있습니다.
인생은 도처가 지뢰밭이니까.
발을 들이는 순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담과 상처들이 주변에 널려 있어요. 그래서 늘 하릴없이 몸이 굳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선 지뢰를 밟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까요. 하물며, 지뢰를 밟고도 살아남을 자신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멈춰 서 있습니다.
하루, 한 달, 일 년 … 저는 ‘가만히’만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존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지뢰를 밟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피투성이가 된 채 꾸역꾸역 지평선 너머로 몸을 감추더군요. 그리고 저는 그저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을 뿐이겠죠. 그러면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문득,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혹은 살아남은 것인가'
언제나 지뢰를 깨울까 봐 발걸음은 물론,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밖으로 내뱉는 모든 감정이 지면에 진동을 일으켜 지뢰를 자극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저는 그게 무엇이든 자꾸만 안으로 삼켰습니다.
점점 속이 메스껍습니다.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지독한 악취.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버텨온 시간 속에서 내가 그토록 삼켜온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상처받지 않으려 삼킨 사랑을,
실망하지 않으려 가두어둔 기대를,
외롭지 않으려 억눌렸던 기다림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많은 마음들을 제 속에 계속해서 꾹꾹 삼켜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허기라도 달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결국 흐르지 못한 마음들은 채 소화되기도 전에 썩어, 저는 그저 좀스러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지뢰를 피한 대가는 '무사함'이 아니라 '부패'였다는 것을.
나는 살아남았고, 그리고 천천히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조금 역겹더군요.
표현이 과격할까요? 하지만 그렇습니다.
지뢰밭 한복판에서 꼼짝달싹 못 한 채, 자신의 악취에 질식해 가는 제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워요.
거침없이 비집고 나오는 자기혐오의 감정을 ‘겁이 많다’는 윤색된 표현으로 슬그머니 달래 봅니다만, 이마저도 슬슬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이따금 구역질까지 참아가며 겨우 서 있을 뿐입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도 제가 역겨우신가요?
사실 이 지독한 악취의 정체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누구보다 투명하게 빛나던 제 예쁜 마음들이었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 삼킨 사랑, 실망하지 않으려 가두었던 기대, 그리고 외롭지 않으려 꾹꾹 눌러 담았던 기다림들.
세상의 지뢰로부터 저를 지켜내고 싶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는데, 흐르지 못한 진심들은 끝내 길을 잃고 문드러졌습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것들이 제 안에서 가장 추악한 냄새를 풍기며 저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그저 제 안의 예뻤던 마음들이 내뿜는 이 슬픈 독기를,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을 뿐이겠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뢰를 밟고 부서지는 쪽이 더 가벼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좀스러우면 좀 어떤가요. 세상에 부담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 걸어보려 합니다. 오랜 시간 쌓여온 악취로 숨이 막히거든요.
제가 떠난 뒤 남겨질 흔적과 악취를 생각하면, 사실 조금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이제는, 발걸음을 옮겨보려 합니다.
부디 살아남는 대신,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