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1) 대학 병원은 왜 그만뒀나?
나는 코로나의 기승전결을 각각 다른 위치의 의사로서 마주했다. 초반에는 대학병원에서, 지금은 로컬병원에서 근무중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후배와 통화하는데 내가 많이 변했단다.
“쌤, 진짜 많이 유해지셨네요.”
“내가? 난 잘 모르겠는데?”
“병원에 있을 때 통화하자고 전화하면 ‘뭐, 왜, 뭔데’ 이렇게 받았는데 오늘은 ‘응~ 여보세요’ 하고 받았잖아요.”
“그래?”
킬킬 웃으면서도 그땐 진짜 그랬지 싶다. 치프 년차되면 일은 쉬워진다는데 일이 늘어난 것도 그랬고, 각종 의국 잡일을 도맡아서 대표를 했어야하니, 병원에 눈꼽만큼이라도 관련된 사람이 연락이라면 예민하게 방어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외 내 동기들은 1년차부터 4년차까지 빠짐없이 주 평균 80시간을 꽉꽉 채워서 근무했다. 인계 및 마감을 포함하면 실제 근무는 더 길었을 것이다. 법적 허용에 맞춰 최장시간 최대효율로 근무했던 것이다. 야간 근무가 있어서 타과에 비해 ‘전공의 보호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신경쓴 스케줄이 주 80시간이니까 우리과가 아닌 다른과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눈가려주는 이중 스케쥴이 존재하는 과 레지던트들은 병원 어디에나 존재하는 게임속 안내 캐릭터 같았다. 개인 콜번호는 당연히 외우고 있었다.
“야, 너 왜 펠로우해?”
“네?”
“지금 로칼 공고 뜬거봐. 월급 많이 세졌다, 장난 아니네. 펠로우 꼭 해야겠니?”
“그러는 교수님은요!”
“나는 교수잖아. 넌 펠로우고. 갓 전문의되서 네 인생에서 최고로 환자 잘볼 때잖아, 남을 거 아니면 지금이 땡길때지.”
“그렇긴 하죠. 근데 중환자 보는 거잖아요”
“전공의 끝나면 뭘 해도 편해. 너가 중환구역에서 일하는 거보다 훨씬 편할 걸.”
“그것도 그렇긴 하죠..”
코로나 초기에 졸국을 하면서 지금 공부 안하면 평생 안한다! 라는 생각으로 당연히 학문에 더 올인하기 위해 선택했던 펠로우의 길이었지만, 코로나 전담 및 거점병원이 생겨나면서 ‘코로나 전담의’의 수당이 응급의학과 봉직의 카페에도 뜨고 의사협회에서 날아온 구인모집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어차피 코로나 병동은 내과를 비롯한 중환자 커버가 가능한 몇몇과에서만 지원이 가능했고, 그 몇몇과에 응급의학과도 끼어있었다. 얼추 따지는게 아니라 따지지 않아도 펠로우 월급보다 훨씬 많았다. 이전이라면 펠로우는 전공의때와 달리 의료보다는 논문 등의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직위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로딩’이 적은게 일반적이지만, 코로나 사태가 되니 나이트 근무도 있고 액팅도 있었다. 이렇게 일할거면 차라리 '코로나 전담의'하고 돈이라도 많이 받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할 것도 아닌데, 펠로우를 꼭 해야하나’
3차 병원이다보니 중증도가 높은 환자가 끊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당이 확실하게 차이나니 일할 맛이 안난다. 응급실에서 코로나 환자를 보긴 하지만 ‘전담’이 아니니까 코로나 수당이 안나온단다. 응급실 격리구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만 보조를 받는단다. 그걸 합해도 전담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월급차이가 너무 많이난다. 우리 병원이 간호사 월급 중에서는 높은 편이라고 하는데도 그랬다. 내가 아는 간호사 선생님들 중에는 아예 병원을 그만두고 전담 병원으로 취직한 선생님은 없지만, 격리 병동으로 차출간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로딩이 별반 차이없어 보인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게 맞긴 하지만 남의 떡임을 감안해도 너무 차이가 나면 안되지.
그래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오래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연구가 더 좋아질까 하는 생각을 접고 깔끔하게 대학에 남는 걸 포기했다. 내가 배운 의료가 그만큼 쓰였다면 그만큼 대우를 받고 싶다.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학자의 길 대신 의료서비스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대학병원에서 내려온 점을 아까워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대학 병원에서 받는 적은 월급에서 비롯되는 회의감보다, 의학의 최선 시류에서 벗어나 뒤쳐진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공허함이 나았다. 적어도 후자는 소위 금융치료라고 불리는 연봉으로 공허함을 희석 시킬 수 있었다.
병원과 의료계에서의 응급의학과의 위치를 다시 깨닫게 된 것도 대학병원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한몫했다.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초반에 응급의료센터에서 일하면서 코로나를 제일 많이 접하는 의료 집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에 대해 새로 나오는 정책이나 병원 내 지침에 대해 가장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야간 등 비상 시에 벌어지는 코로나 확진자에 대한 치료 및 격리 방향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결정해야 하는 임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얻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부심이 무색할 만큼 병원 내 속사정은 달랐다. 우리 병원 뿐만이 아니라 응급실은 당시 유일하게 병원 내에서 격리 시설이 갖춰진 곳이기 때문에(안심진료소가 만들어지기 이전이었으니까) 일반 환자나 보호자 중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환자들은 소위 입구컷되어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외없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정량적인 면에서 지속적으로 코로나 의심환자들이 밀려들어오는 데 이게 아무리해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까지 몰렸다. 시간이 지나서 응급실 내 감염 환자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꽤 잘 버텨나갔다그런데 ‘응급실은 버리는 전략’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좋게 말하면 응급실이 병원 문을 닫지 않는 한 코로나 진료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일하는 입장에서 실질적으로는 외래나 병동에서 응급도를 따지지 않고 ‘열나거나 인후통이 있거나, 일단 의심이 눈꼽만큼이라도 되는 환자’에 대해서 무조건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라고 하니, 소위 감염환자 처리반이 된 느낌이었다.
"응급실은 감염환자 나와도 되요, 근데 병실은 뚫리면 안되잖아요."
병실 내, 외래 환자 중 코로나 확진자에 대해서는 치를 떨면서 응급실 내 감염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거긴 확진자 나와도 자체 처리하잖아요)’라는 말이 들렸다. 뉘앙스의 차이였지만 일단 응급실은 버리고 간다! 라는 뉘앙스의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리니 자긍심이 한없이 비루해졌다. 내가 응급실을 지탱하는 주출돌이 아니라 응급실 둑을 막기 위해 창고에서 가져온 재고 벽돌같은 느낌이다.그런 생각이 드차라리 내가 일한만큼 존중받을 수 있는 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병원에서, 특히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면 자주 느낀다. 나는 레고 조각 퍼즐같은 느낌. 내 능력의 위주가 아니라 병원이 필요로 하는 곳에 나를 맞춰가는 것. 도제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상명하복 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기형적인 공동체 의식을 배경으로 병원이 굴러간다. 또 개미같은 우리들은 배정된 일을 꾸역꾸역 해낸다, 어떻게든. 환자의 목숨이랑 직결이 된 일인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선후배와 동기의 도움을 짜내면서 기형적인 공동체감이 더욱 두터워진다. 그러니까 병원도 의사회도 정부도 되는 줄 알고 당연하게 행정명령을 남발하게 되고, 거기에 죽어나는 건 의료인, 진짜 죽는 건 환자다.
응급의학과 및 의료센터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은 간혹 들었지만 이번엔 좀 셌다. 우리는 ‘응급실은 emergency 와 urgency에 대해 구분하여 환자의 입퇴원을 결정하는 과’라는 말에 맞춰 응급 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선별하여 우선 치료를 하는 것을 목표로 수련을 한다. 하지만 이게 ‘응급실에 가면 빠르게 치료’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사회라서 병원이 문을 닫는 ‘야간 진료’나 ‘빠른 진료’를 위하여 진짜 응급한 환자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경환 환자들을 볼때마다 현타와 회의감이 들어왔다.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학회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하는 와중에 코로나가 터지고, 병원 상부와 정부의 정책 상 ‘코로나 의심자는 응급실에서 빠른 진료로!’ 라는 인식을 마구마구 심어주니 우리가 ‘Emergency tract’가 아니라 ‘Fast tract’에서 일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시각 차이를 메꿔야 할 때에 이런식으로 더 벌어져 버린다. 다음 전염병 때도 똑같을 것이며 응급의료센터에 ‘응급’이라는 정의가 정책에 맞게 바뀔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또 한없이 슬퍼지면서 과장님께 내년에는 펠로우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P.S.
지금 생각해보면, 끝까지 최전선에서 일하지 함께 못한 것에 대해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지만, 다시 생각해도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내가 살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의료인이라는 것에 회의감을 더이상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고 처음 게시할때만 해도, 지금쯤이면 모든 것이 끝나있을 것이라(2022년 9월), 혹은 이전처럼 돌아갔을 것이라 믿었는데 아직도 나는 마스크를 쓰고 진료를 하고 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사람들은 이제 코로나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우리처럼 상황에 따라 요리조리 바꿔야할 과는 잘 적응하며 의료시스템을 유지해간다. 코로나가 끝나도, 끝나지 않아도 내가 있을 자리를 찾은 것, 아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