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싼데 부동산이 비싸서 가지를 못 말린다.
이놈의 아파트엔 빨랫줄도, 베란다도, 옥상도 없으니까.
햇볕 받고 바람 맞혀 말리고 싶은데
전기 먹여가며 건조기에 말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두어 평의 여백이 있으면
빨래도 널고, 나물도 말리고,
이따금 나도 나가 앉아 곰팡이를 말릴 텐데
그 두어 평마저 융통성 없는 욕심으로 꽉꽉 채워 산다.
그리고 그 여백이 없으니
나물 말리는 건조기, 빨래 말리는 건조기,
목적에 맞는 건조기를 따로 사야 하고
이젠 그 건조기들을 두기 위한 여백을 마련해야 한다(?)
이게 뭐람.
도시가 아파트 숲이 되기 전엔 어땠냐면,
일반 주택들엔 작게나마 마당이 있었고 옥상이 있었다.
마당엔 빨랫줄도 걸고 평상을 놓아 나물도 말리고,
때론 이웃들이 와 수박을 쪼개먹었다.
어느 집 옥상에는 이집 빨래, 저집 빨래 할 것 없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갑작스런 소나기엔 이 집이고 저 집이고 누구라도 한 명만 있으면
소나기에 젖은 빨래 다시 말릴 일 없었다.
물론 윗집 아저씨 빤쓰가 우리 집 빨래에 따라 섞이는 참극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이전, 한옥엔 툇마루도 있었다.
거기선 겨울을 위해 시래기도 말리고, 메주도 달았다.
툇마루 아래는 이따금 새끼 밴 고양이의 산실도 되었다가,
며칠이 지나면 어느새 자연스레
새끼 고양이들과 어미가 나란히 툇마루에 올라앉은,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이 되곤 했다.
특별한 용도 없이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래서 언제든 무엇으로도 가득 채울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이 ‘여백’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린 그 용도 없는 여백 속에서 서로 관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선 그런 ‘쓸데없는’ 공간이란 사치지.
그러니 툇마루도, 마당도, 베란다도 사라진 내 집에선
가지 말릴 틈도 없이 나 혼자서 말라간다.
월화수목금토일,
하루 24시간이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 없이 꽉 차게 돌아가는데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말하자면 여백 없이 나로 가득 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가지는 싼데 부동산이 비싸서
건가지 하나 못 만든다.
정말 뚁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