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말할 수 없는 것
중년이 왜 슬픈 것이냐 묻는다면,
추억은 이미 멀고 미래는 멈춰버린,
앞뒤로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매연 같은 단어들만 콸콸 쏟아내며
잡히지 않는 GPS 신호를 기다리는 조난자 신세라서요.
창밖의 풍경이 자유인 줄은 알아요.
하지만 이제는 꺾을 수가 없어서,
그저 꺾여버린 거지요.
도무지
한 호흡의 열기도 아쉬운 이 시절엔
저 산 아래 터지는 꽃망울을 보고도 침묵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다면서요.
이제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야 한다고.
비트겐슈타인 같은 천재 철학자마저도
더 이상은 언어로 정의할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세계’가 있었다니
우리라고 별 수 있나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사는 것으로밖에 증명할 수 없는 세계.
이제 우리에겐 그것이 바로 ‘봄날’ 아닐까 말입니다.
그러니 혀끝을 동여매려 알감자를 입에 넣는 거지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괜히 알감자를 파는 게 아니죠.
“봄감자가 맛있단다, 봄감자가 맛있단다.
이 감자 한 알이,
말할 수 없는 저 봄보다 좋은 거란다.”
이제 청춘이 왜 푸르다 하는지는 알겠어요.
맞아서 그래요.
옳아서도, 수없이 맞아서도 —
그래서 그렇게 푸른 거겠죠.
이제는 맞을 일 없이,
틀려버릴 날만 남은 것 같은 우리에게
봄은 무연히 또 오겠지만,
더는 우리의 언어(몸)로는 증명할 길이 없는 거겠죠.
그럼 뭐 어째,
목구멍을 콱 틀어막는 봄감자나 먹어야지.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