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사로운 일상공상23

“철학의 임무는 언어의 사용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by Parasol

- 비트겐슈타인


철학자들의 철학자라 불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 깊이 탐구하여 언어철학, 심리철학, 인식론 등에 큰 영향력을 남겼다.


철학자는 아니지만, 용어의 엄밀함에 집착하는 또 하나의 무리가 바로 과학자라 할 수 있다. 물론 국책연구소 등이 아닌 일반 사기업의 직장인 중에서는 공학자(엔지니어) 무리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끈 핵심 산업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라는 두 용어 모두 재미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반도체에 대해 살펴보자. 반도체의 ‘반’ 절반(semi)을 의미하는 접두어를 가지고 있어, 전기가 잘 흐르는 도체와,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 사이에 존재하는 적당히 전기가 흐르는 물질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보다 엄밀하게 보자면, 반도체는 단순히 전도도가 중간 수준인 물질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외부자극(온도, 전압, 빛 등)을 가하면 전기가 통하는 수준(전도도)을 조정할 수 있는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내가 원하는 대로 전기를 통하게도, 또는 통하지 않게도 할 수 있어 on(1)/off(0)가 가능한 스위치로 역할할 수 있다는 것이 반도체라는 물질의 핵심 특성이다.


이처럼 ‘반도체’ 자체는 특정한 전기적 성질을 지니는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반도체를 단순히 실리콘으로 대표되는 재료의 카테고리로 사용하기보다는 반도체를 이용한 IC, 센서, 메모리칩과 같은 제품, 그리고 관련기술 전반을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언어의 엄밀성을 강조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초기 관점으로 보자면, 반도체가 물질이 아니라 마치 IC칩인 양 오해를 일으켜 논리적 명확성을 잃은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후기 관점에서 보자면, 반도체가 단순한 물질을 지칭하는 용어로 머물러 있지 않고, 반도체라는 용어가 공동체의 사용 방식에 따라 자연스레 특정 기술이나 제품을 가리키는 용어로 유연하게 변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 과정은 반도체뿐 아니라, 낯설고 어려운 신기술을 쉽고 친숙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적극 활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구름을 나타내던 ‘클라우드’라는 용어를 차용해 개인 컴퓨터가 아닌 공용 서버(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개념을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게도 하는 것이다.



이젠 디스플레이를 살펴볼 차례이다.


디스플레이(display)는 라틴어의 ‘dis’와 ‘plicare’의 합성어에서 온 말이다. dis는 ‘멀리’ 또는 ‘부정(반대)’의 뜻을 지니는 접두어이며, plicare는 접다(fold)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디스플레이는 결국 무언가를 펼쳐서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말 그대로라면 최신 폴더블 스마트폰들이야말로 진정한 디스플레이라는 용어에 적절한 폼팩터가 아닌가 싶다.


디스플레이라고 하면, LCD(Liquid Crystal Display; 액정디스플레이)를 빼놓을 수 없다.


‘액정(Liquid Crystal)’은 반도체보다는 조금 더 본래의 단어에 걸맞게 액체와 결정(고체)의 중간적 성질을 보이는 물질이다. 액체처럼 흐르는 성질을 지니면서도 액체처럼 무질서하지 않고, 결정처럼 어느 정도의 규칙적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 액정이다.


핸드폰이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핸드폰에서 화면의 역할은 문자를 확인하거나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정도의 간단한 문자정보 정도를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핸드폰은 한순간에 손 안의 컴퓨터가 되며 화면의 중요성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그에 따라 과거에는 작은 화면에 폴리카보네이트와 같은 충격에 강한 투명 플라스틱으로 보호되던 화면이, 보다 선명한 강화글라스로 처리된 거대한 LCD화면으로 교체되며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더 큰 화면에 선명한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로 인한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한 번씩 핸드폰을 떨어뜨리면 여지없이 핸드폰의 전면부 유리가 깨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소위 ‘액정‘을 교체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 시절 입에 붙어 버린 ‘액정’이라는 단어는 핸드폰의 화면을 지칭하는 단어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세월은 흘러 더 나은 품질과 기술 혁신을 추구하는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개발 경쟁으로, 현재의 핸드폰의 많은 화면들은 액정디스플레이가 아닌 OLED디스플레이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용어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 법이라, 최신형 OLED디스플레이를 장착한 핸드폰을 떨어뜨려도 사람들은 여전히 ’액정‘을 깨 먹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역시나 비트겐슈타인적 입장에서 보자면 언어는 관습적 사용과 맥락에 의해 의미를 얻기 때문에, ‘액정’이란 단어는 실제의 물질이나 기술적 정의를 초월하여, 사람들이 대화에서 필요로 하는 실용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핸드폰의 화면을 부르는 ‘액정’이라는 말은 더 이상 ‘Liquid Crystal’이 아닌 것이다.


세대를 구분 짓는 농담으로 전화받는 모습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다. 구세대 사람들은 주먹을 쥔 손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쭉 뻗어 옛날 송수화기를 든 모습을 흉내 내는데 반해, 요즘 세대들은 손바닥을 쭉 펴서 볼에 갖다 대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액정 없는 핸드폰의 ‘액정’ 깨 먹기도 어쩌면 조만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에 입각해 언어의 엄밀성을 따져본다.


치킨은 먹어도 살 안 찌고, 살찌는 건 나일뿐이듯,

사실 액정은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다. 깨지는 건 오로지 핸드폰 전면부를 보고하고 있는 강화유리요, 내 통장 잔고일 뿐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