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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

바나나우유에 담긴 아빠의 마음

by 이수 E Soo


작년 12월, 한국 방문을 위한 항공권을 예매하기 전에 에어캐나다와 대한항공 중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에어캐나다에 다니는 친구가 직원 할인권을 제공해 준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혜택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대한항공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위탁 수하물 2개가 제공된다는 점과,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나 큰 이슈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국에 갈 때쯤, 에어캐나다는 당시 ‘파업’ 이슈가 있었고, 캐나다에서는 이런 일이 비교적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컸다.

나는 이미 회사로부터 확정된 휴가를 받은 상태였고, 항공권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없는 조건이었기에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결국 대한항공 티켓을 선택했다.


포근하고 따뜻한 12월의 첫 주, 캐나다 피어슨 공항을 출발해 대한항공 비행기는 15시간의 긴 여정을 거쳐 제2 여객터미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이 15시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다. 직항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은 피할 수 없다. 처음 10시간은 그나마 여유롭고 자유롭다. 밀린 잠을 자기도 하고, 하얀 구름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는 안에서 신기한 듯,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며, 최신 한국 영화를 빠짐없이 감상했다. 하지만 남은 5시간이 되면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비행 중에는 두 번의 식사와 한 번의 간식이 제공되었다. 이번 메뉴는 가지 덮밥과 비빔밥이었다. 대한항공 기내식은 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가지덮밥이라니. 나는 가지를 좋아해서 더 반가웠다. 매콤하고 달달한 소스에 부드러운 가지와 각종 채소가 어우러져 입맛을 돋웠다. 같이 나온 달달한 조각 케이크는 비행으로 인해 살짝 예민해진 나를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두 번의 우유를 마셨다. 나는 하얀 우유를 좋아한다. 그래서 키가 큰 걸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곤 한다.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키가 컸어?" 예전에 엄마와 옷가게에 갔을 때, 매장 직원이 엄마에게 물었다.

“따님 키가 정말 크네요! 어떻게 이렇게 키우셨어요? 비결이 뭐예요?” 그럴 때마다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우유요! 하얀 우유!"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 우유를 좋아했다. 어릴 때는 물처럼 우유를 마셨다. 지금도 목이 마르거나, 일하는 중간에 갑자기 마시고 싶어지는 건 콜라도, 주스도 아니다. 언제나 하얀 우유다.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으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콜라를 주문할 때, 나는 어김없이 우유를 시킨다. 이제는 친구들도 익숙해져서, 내가 우유를 주문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이번 기내 간식으로는 핫도그가 나왔다. 뜨거운 핫도그를 후후 불어 식히며, 시원한 우유와 함께 먹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왜 바나나 우유는 없을까?


음악을 듣고, 잠을 자고, 그동안 보지 못한 한국 영화를 모조리 보고 나서야, 그 지루한 시간이 끝나고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설렘이 가득하다.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가족이 있는 곳.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한국.

2개의 수하물을 찾아들고,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자동문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종이에 이름을 적어 들고 있고, 누군가는 플래카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그 사이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향해, 익숙한 얼굴이 달려온다.
"누나!"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덥석 안기는 남동생.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누나 왔네!"
"그래, 누나가 왔어."

보고 싶었다. 내 동생.




공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편의점에 들른다.
내가 사는 곳에도 한국 마트가 있어 여러 종류의 한국 과자를 살 수 있지만, 한국에 오지 않은 사이 새롭게 나온 과자가 있는지 궁금했다.

"먹태깡 청량마요맛"
처음 보는 과자다. 이건 뭐지? 맛이 어떨지 궁금했고, 동생도 맛있다고 추천해 주기에 망설임 없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장 가지런히 진열된 우유 코너로 향했다.

"바나나 우유는 어딨 지?"

찾았다. "바나나 우유!"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치자마자, 기다릴 새도 없이 빨대를 꽂았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나나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아, 좋다. 한국에 왔구나!"

바나나 우유를 마신 걸 보니... 정말 한국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난다.


캐나다에도 팩 바나나 우유는 있지만, 이렇게 볼록한 단지 모양의 바나나우유는 없다.

하나를 단숨에 마시고, 양손에 하나씩 들고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집을 향했다. 가는 동안 바나나우유를 하나 더 꺼내어 빨대를 꽂았다.

인천대로를 지나며 차창을 열었다. 차가운 12월의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창밖을 한참 바라보니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이렇게 많아? 이게 다 아파트야? 와, 높다!"

마치 처음 처음 온 사람처럼 감탄을 연발했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높고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들을 보니, 숨이 턱 막히고 답답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매일 달라지는 구름의 모양을 보며, 연두에서 초록으로, 노랑에서 주황과 빨강으로, 다시 갈색으로 변해가는 나무들의 색을 탁 트인 시야에서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이곳의 풍경은 내가 사는 곳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아파트들은 예전부터 그대로였을 텐데,

나는 올 때마다 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집앞에 펼쳐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캐나다(같은 장소)


긴 인천대교를 지나니, 어느새 엄마 아빠가 계신 집에 도착했다. 내 마음이 설레는 것처럼, 길도 금세 짧아진 듯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엄마와 아빠가 단숨에 나에게 달려왔다. 아빠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무거운 백팩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셨고, 엄마는 나를 꼭 껴안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진이 왔구나! 우리 딸."

엄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잔치를 앞둔 것처럼 푸짐한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한가득이다. 냉이, 달래, 꼬막무침, 꽃게탕, 조기구이, 조개젓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김치까지 그리고, 온갖 가짓수의 음식들.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한 밥상이었다.

엄마가 차려준 음식을 배가 부르게 다 먹고 나서, 나는 공항에서 사 온 바나나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색소만 가득한 바나나 우유는 건강게 좋지 않다며, 마시지 말라고,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하얀 우유를 건네셨다.

"아빠, 나도 하얀 우유가 건강에 좋은 건 아는데요.

이 바나나 우유는 캐나다에 없어요."

"이 맛이 좋은데, 캐나다엔 없어서 못 마셔. 그래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산 거예요."

"캐나다에는 없어? 그럼, 마셔야지. 근데 왜 없지?

수진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가"

아빠는 못내 아쉬운 듯, 조용히 뒤돌아 나가셨다.


친구가 선물로 준 키링과 601비상 바나나우유 노트.


나는 시차로 인해 비몽사몽 하다가 깊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니 집안은 조용했고, 아빠는 이미 아침 일찍 출근하신 뒤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식탁에 앉았을 때, 아빠가 적어둔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진이 바나나 우유 사놨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마시고 가야지!"

냉장고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냉장고 한 칸이 온통 바나나 우유로 가득 차 있었다. 몇 개만 사다 놓아도 되는데 아빠는 한 달 동안 마실 바나나 우유를 잔뜩 사두셨다.

아빠의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표현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없다는 내 말에, 아빠는 잊지 않고 나를 위해 세심한 마음을 담아 표현하셨다. 아빠의 사랑은 깊고 넓으시다.

크게 표현하지 않으시지만, 그 사랑이 이렇게 배려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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