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쓰고 있어 서운해'라고 말했나 봐요.
이곳은 저녁이지만, 한국은 이제 막 아침을 맞이했겠지.
하루를 마무리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 분주한 아침의 흔적이 남은 책상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밖에서는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거센 바람이 요란하고, 찬 기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다. 몸을 웅크리게 만드는 싸늘한 공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다.
조용한 저녁, 오늘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때 카톡이 왔다.
“안녕, 수진. 설 명절 잘 보냈어?"
서로 아이폰이 있으면 아이메시지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나 지인들과는 대부분 카톡을 이용한다. 국제전화를 쓰기 어렵다 보니, 가끔은 카톡 전화로 통화한다. 예전보다 소리도 선명하고 잡음도 거의 없어, 캐나다와 한국의 거리가 무색할 정도다. 반가운 목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내가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있는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일지도 모른다.
메시지는 한국에 갔을 때 만나지 못한, 나의 멘토와도 같은 분에게서 온 것이었다. 아마도 시간이 맞지 않아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마음에 쓰이셨나 보다. 마음이 쓰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분은 내가 고민을 나누면 조언을 아끼지 않던 어른이셨고, 인생의 멘토이자 조언자이기도 했기에, 못 뵙고 온 게 마음에 걸렸었다. 그 생각이 희미해질 즈음, 카톡 알림이 울렸다.
캐나다에 살다 보니, 추석이나 설날이 점점 멀게 느껴진다. 해가 바뀌는 1월 1일에 가족과 전화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면, 다시 설 명절 인사를 따로 해야 하는 게 점점 번거로워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두에게 두 번의 새해인사를 생략했다.
그러던 중, 설 명절 안부를 묻는 카톡을 받은 것이다.
"아, 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길고 긴 설 명절 잘 보내셨어요?"
"한국에 갔을 때 못 뵙고 와서 조금… 많이 서운했어요."
"미안… 나도 아쉬웠어. 다시 올 때 보자!
수진,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그분께 메시지를 보냈을 때도 나는 "서운해"라는 단어를 썼고, 그분은 "아쉬워"라고 답했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단어들이었는데, 오늘 다시 같은 단어를 주고받으며 문득 그 차이가 궁금해졌다. 서로 다른 표현을 썼고, 그 의미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그분은 별 의미 없이 "아쉬워"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단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 감정은 "아쉽다"보다는 "서운하다"에 더 가까웠다.
내 생각을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아쉬워'와 '서운해' 중 어떤 말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친구는 대답했다.
"'서운해' 보다는 '아쉽다'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아. 사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친구와 조금 긴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국 그녀는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일에 대해 서운함이 아닌 아쉬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럼 나는, 어떤 마음을 쓰는 걸까?
그래서 두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서운함을 느낄 때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여성이 생일에 남자친구가 선물을 사주지 않으면 당연히 서운하고 화도 날 것이다. 그러나 남자친구가 군대에 가 있는 경우에는 생일선물을 받지 못해도 서운하기보다는 그저 아쉬워할 것이다. 상대방이 어쩔 수 없이 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운함의 저변에는 자신의 행동을 현재의 상황에 연관시켜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기울인 관심에 대한 보답을 연상하는 것이다. 서운함에는 자신이 항상 희생하고 무시당한다는 사고가 작용한다. 그러나 아쉬움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나 상황에 국한된 것이다. 친구가 자신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갈 때 무시당한 것으로 서운해 할 수 있으나 바쁜 일이 있거나 못 본 것으로 여기고 아쉬워할 수도 있다. 매사를 자신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흑백논리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어떤 상황을 상대적이고 객관적이 아니라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행동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극단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데도 일부를 마치 전체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느낀다면 너무 큰 기대를 하거나 상황을 지나치게 흑백논리로 보고 있거나 자신의 자존심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항상 자신을 우선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황도 고려해 본다면 아쉬움은 남을지라도 서운함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속상해하는 경우는 크게 감소하고 마음도 훨씬 평온해질 것이다.
[문화단상]서운함과 아쉬움의 차이_김성일 전 강릉원주대 교수
이 글을 읽으며 문득, '나는 그분의 입장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 감정을 우선시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는 스스로 나쁜 방향으로 생각을 흐르게 둔 건 아니었을까. 서운한 감정을 키우면서, 나도 모르게 속상해하고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날, 이 단어에 유독 몰두했던 걸지도 모른다. 지나가도 될 감정들을 내가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음날, 친구들에게 "서운함"과 "아쉬움"의 차이에 대해 물어봤다. 그런데 그들은 나처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쉽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아."
그렇다면, 내가 "서운해"라는 단어를 썼다는 건 그만큼 내 안에서 감정을 키우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마음을 가볍게 두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려했다면, "서운해"가 아니라 "아쉬워"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을까?
어쩌면 조금 사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하루 종일 이 두 단어에 대해 곱씹게 됐다.
그렇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아쉬움보다 서운함이 마음 한편에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다음에 한국에 가서 그분을 만난다면, 하고 싶은 얘기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고 전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서운했다'라는 말을 그분께 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