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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ug 16. 2021

익명성 보장이란 책임의 어려움

course representative(수업 내 학생대표)

스웨덴 대학에서는 각 수업마다 한 명 또는 두 명의 학생에게 course representative라는 역할이 주어진다. CR(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은 수업에서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은 없는지, 불만사항은 없는지, 수업 내에서 부당한 경험을 당하지 않았는지 살피고 수업 담당 교수와 발견한 사항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교수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더 높은 책임자와 만날 수도 있다. 학생들이 대놓고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내용을 CR이 대표해서 학생들의 익명성을 유지하며 교수나 더 높은 책임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첫 학기에는 CR이 뭔지 몰라서 어리벙벙했었는데 한 학기 동안 CR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보고 나도 왠지 하고 싶어 졌었다. 마침 다음 학기 수업이 지도 교수의 수업이기도 했고 친구들도 그래도 네가 더 말이 잘 통하지 않겠냐 하면서 내가 CR 역할을 맡게 되었다.


CR의 역할을 겉에서만 지켜보기도 했고 정확히 이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었다. 다행히 교수가 먼저 나서서 미팅을 만들고 나에게 사전에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거다 미팅의 내용을 필기해야 할 거다 등등 하나하나 알려줘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교수가 워낙 수업을 잘하기로 유명해서 수업 내에서 큰 문제없이 CR 역할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할에 자신감이 붙어서 또 하겠다고 나선 다음 학기였다. 이 전 학기처럼 하면 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수업은 항상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수업으로 악명이 높았다 (어려운 과제 레벨에 비해 기한도 짧고 과제에 대한 설명이나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 이 전에는 내가 이메일을 돌려서 학생들의 의견을 받았었다면 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불만을 잔뜩 털어놓았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학생들과 동화되어 같이 흥분해서 수업 욕을 했었다.


그때만 흥분하고 교수와는 차분하게 미팅을 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미팅을 하면서 내 말투가 날카롭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부드럽게 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교수를 보면서 미팅 중간에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교수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고 나도 그 이후부터는 차분히 미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끝까지 잘 미팅을 이어나가나 싶었는데 교수가 무심코 건넨 물음에 나는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근데 애들이 피드백을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지? 나도 매년 학생들이 피드백을 보내주는 수가 줄어서 고민이야."

"맞아. 모든 학생들이 피드백을 하지는 않더라. 이것도 우리 학과 학생들이라 받았지 다른 과 애들한테는 하나도 못 받았어."


말을 끝내자마자 알아차렸다. 아... 망했다. 우리 학과에서 이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이라고 해봤자 5명뿐이었기에 익명으로 전달한 피드백에 단번에 유추 가능한 범위를 제공해버리고 말았다. 교수는 특별한 반응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나는 그 순간 너무 당황해서 이후 그저 교수의 말에 맞장구를 쳐가며 얼른 이 미팅이 끝나기를 바랐었다.


이 날 이후 익명을 지킨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이 실수가 친구들에게 불이익이 되는 일은 없었고 이후 CR역을 맡아서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주의를 하며 학생들의 의견을 교수에게 전달했다.


역시 무슨 일이든 일단 해봐야 만만치 않다는 걸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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