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하까와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
밤 11시 반에 멕시코 시티를 출발한 야간 버스는 예정되었던 도착시간보다 1시간 반이나 빠른 새벽 6시에 와하까에 도착했다. 와하까는 (Oaxaca) 멕시코 중남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동명인 주의 주도다. 과거 식민지배 당시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고, 인디오 여러 민족들이 지금도 모여 살아서 현대화/서구화된 대도시와 다르게, 진짜 멕시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도시라고 한다. 비몽사몽 정신없이 버스에 내려서 처음 느낀 와하까는 시릴만치 추웠다. 잠을 많이 못 자서 움직임이 둔했다. 나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옷을 꺼낼 생각도 없이 터미널 벤치에 웅크리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새벽엔 그렇게 춥더니 오후에 다시 나온 와하까의 태양은 말도 못 하게 뜨거웠다. 일부러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나온 나는 금세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와하까 시내 길거리는 아기자기 운치가 있다. 건물은 거의 모두가 2층으로 옛 양식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바둑판 식으로 이어진 길 덕분에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마다 같은 높이, 다른 색의 건물들이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대도시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알록달록한 건물과 푸른 하늘이 이 작은 도시를 한껏 돋보이게 해 준다.
다 좋은데 매연 냄새가 너무 심했다. 공장 같은 건 없는 것 같고 아마 노후된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인 것 같다. 매연을 피해 들어간 동네 빵집에서 하나에 200원 꼴의 크루아상과 애플파이를 맛볼 수 있었지만 매연냄새는 종종 머리를 아파오게 했다.
여전히 인디오들이 많이 살고 있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와하까 답게 대표적인 명소로 섬유박물관이 (Museo Textil de Oaxaca) 있다. 지금도 전통방식 그대로 섬유제품을 만든다고 하는데 그 과정이 섬세해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외지인들에게 값싼 가격에 팔리기 때문에 인디오들의 애환이 담겨있다고 한다.
해가 지고 드디어 공기가 시원해진다. 어느새 지친 나와 다르게 작은 도시는 밤이 되자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성당 종소리가 울리고, 시원한 공기가 내려앉은 길엔 사람들이 가득하고, 쭉 늘어선 노점상에선 지글지글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때앵~ 때앵~' 종소리가 자주 울려서 그럴까? 담벼락이나 분수대 난간을 의자 삼아 앉은 커플들은 입술을 훔치기에 여념이 없다. 아마 하루에도 몇 번씩 종소리를 들으며 저렇게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와하까는 분지다. 낮에 사진을 찍다 보면 멀리 배경에 산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훨씬 쉽게 산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바로 멀리 언덕께 동네에서 빛나는 불빛 때문이다. 그득하게 들어차 있다기 보단 띄엄띄엄, 불빛을 하나씩 셀 수 있을 정도로 빛나고 있다. 아름다운 도시 와하까,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벌써 이곳이 꼭 맘에 든다.
밤이 오고 산토 도밍고 광장엔 음식 냄새가 가득하다. 맛있게 먹은 길거리 햄버거, 젊은 사장님(?)은
비록 노점상이지만 위생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모양으로 돈을 주고받을 때는 반드시 전용 장갑을 꼈다.
올 봄엔 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알아보느라 바빴었다.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한다는 건,
마치 차곡차곡 조금씩 모은 모래더미에
드디어 물을 부어 튼튼한 모래성을 만드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내 집은 커녕 큰 베낭 하나가 전부다.
오늘 버스에서 자면 내일은 침대에서 자고 또 다음날은 다른 곳에서 잘게다.
칠흙같은 어둠, 유일하게 빛나는 버스 앞 전광판 시계를 본다.
고개는 시트에 묻은 채 멍하니 눈만 끔뻑인다.
사는 방법은 다 다른 모양이다.
열심히 모래성을 짓던 아이는 잠시 해변가를 떠났다.
(잠깐이겠지만) 지금은 모래성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버스에서 잠을 청해도 이대로 충만하니 부자가 된 것 같다.
와하까에서 밤 9시에 출발한 버스는 예정된 시간을 2시간 정도 넘긴 아침 9시에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에 (이하 '산 크리') 도착했다. 중간에 길이 막혀서 (말 그대로 지날 수 없게 길이 '막혔다'.) 1시간 정도 정차해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 같다. 지역에서 일어난 데모 때문이라고 했는데 처음엔 '그래도 어떻게 고속도로의 통행이 중단될 수가 있지?' 싶었지만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이 우리나라처럼 잘 닦여있지 않기 때문에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도 않다.
'산 크리'에는 소칼로 광장을 중심으로 양쪽 끝에 언덕이 있고 각 언덕에는 작은 성당이 있다.
그중 먼저 찾아간 노란 성당. 아, 아침에 같이 버스를 타고 온 독일 친구 Alex를 우연히 소칼로에서 다시 만났다. 그래서 이 성당부터 하루를 마칠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87년생인 Alex는 독일 슈트가르트 근처의 도시에서 IT 아키텍처로 일한다고 했는데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직업이나 꿈, 결혼 등에 대해서 많은 공감대를 갖고 얘기할 수 있었다. 점심부터 저녁식사까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던 날.
재미있는 점은 이 작은 마을에 태권도장이 2개나 있다는 사실이다. 둘 다 한국에 왔다 갔다 하며 공인 단증까지 딴 멕시코 관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멕시코 아이들이 아주 열심이었다. 태권도답게 단순히 무술이 아니라 예의와 정신수양까지 함께 가르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 곳뿐 아니라 지진 피해 때문에 보수 중인 곳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신앙심이 유별난 멕시코인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일까 싶었다. 저렇게 부서졌지만 성당 바로 옆 작은 건물에 임시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만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잠깐의 인연이지만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누군가와는 더 금방 친해질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나이가 비슷해서 공감대가 많았던 Alex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다음날, 이 날은 멕시코 남동부를 대표하는 주, 유카탄의 주도 메리다로 가는 날이었다.
산 크리에서 메리다까지는 무려 17시간 30분이 걸리는데 그래선지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
코앞에서 보는 것보다 내려다보는 것이 더 아름다운 작은 마을,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
담벼락이나 건물이 모두 2~3층 높이라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내가 어디쯤인지 분간이 안된다.
그러면 앞뒤로 두리번대다 이내 멀리 바라본다.
담벼락 너머, 마을 중앙 소칼로 광장의 만국기나 언덕 위의 작은 교회 따위를 찾아서 방향을 다시 가늠한다.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한 달.
매일 새로운 곳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로서의 나' 보다 그냥 '나'로서 생각하게 된다.
직장인도, 30살도, 아들도 아닌 그냥 나와 내 마음, 내 길, 내 꿈...
막연할 수도 있는 생각의 연속, 그러다 어디쯤인지 분간이 안되면 이내 멀리 바라본다.
지표가 되어주는 게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오래된 작은 티브이에 역시 오래된 티브이 쇼가 나온다. 꼭 시간 여행을 간 것만 같다.
멕시코 여행에서 장거리 버스는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멕시코 시티와 칸쿤같은 유명 관광지만 둘러본다면 국내선 항공권을 탈 수도 있겠지만 와하까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 빨렌께 같은 작지만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자면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지형적으로 정글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에 직선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겨우 다른 도시에 도착하면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게 밝다. '편리함'은 분명 좋은 하나의 가치지만 그걸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가치가 많은 나라인 것 같다, MEXICO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