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잘 먹고 잘 자는 게 참 쉽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럴까? 6일을 머물렀던 보고타에서도 그렇고 10일 정도를 머무를 에콰도르의 키토에서도 첫 날은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요즘 주로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구하고 있는데 대부분 부엌을 사용할 수 있어서 최대한 식료품을 잘 구비해놓고 머무르는 동안 챙겨먹기 위해서다. 특히 키토에서는 일주일간 스페인어 수업을 들을 예정이라 다른 도시보다 조금 더 머무르게 돼서 장 보는데 더 공을 들였다.
어젯밤 11시, 보고타를 출발한 비행기는 오늘 0시 30분 정도에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 (Quito) 공항에 착륙했다. 이런저런 수속을 마치고 시내로 향하는 택시에서 느낀 키토의 첫인상은 길이 넓고 구멍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쿠바는 말 할 것도 없고 콜롬비아에서도 차도 군데 군데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있었는데, 여긴 길이 깨끗하고 부드러운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택시도 처음으로 중형 세단에 탔다. 평범한 한국산 중형차였지만 내겐 다리를 쭉 펴도 될 만큼 넓게 느껴졌다.
느즈막히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Google Map으로 근처 마트를 검색했다. 다행이 300m 정도 거리에 큰 마트가 있길래 쪼리 슬리퍼를 직직 끌고 길을 나섰다. 대형마트였다. 남미에서도 못사는 나라에 속하는 에콰도르라 크게 기대하진 않았었는데 미국이나 우리나라 마트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USD를 화폐로 써서 그런지 물가 자체는 멕시코나 콜롬비아에 비해 싸게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과일코너부터 시작해 하나 하나 꼼꼼히 고르면서도 속으론 제발 한국 라면이 있길 기원하고 있었다. 근 한 달 동안 한국음식은 전혀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음식, 특히 매콤한 라면이 너무 그리웠던 터였다.
아침은 매일 집에서 먹고 나갈거라 아침거리를 꼼꼼히 사고 간간히 해먹을 저녁을 위해 닭고기와 소고기, 파스타 재료도 골랐다. USD를 써서 그런지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공산품이 거의 다 있었고 가격도 싸진 않았다. 하지만 고기나 야채, 과일은 다른 중남미 국가처럼 저렴한 편이었다. 여행자로서 장을 보면 생각보다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자주 이동해야 하니 쓰고 남는 게 없도록 구매하는 양을 잘 생각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여러 요리에 쓰이는 조미료나 재료를 고르게 된다. 오늘은 한국식 계란밥을 해먹고 싶어서 간장과 참기름을 찾았는데 간장은 다른 요리에도 쓸 수 있고 저렴해서 골랐지만 참기름은 거의 USD 5에 육박해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더 저렴하고 쓸모가 많은 올리브유로 대체하는 걸로 정했다. 한국이었으면 1초도 고민 안 할 것들도 여행 중엔 발을 멈추게 한다. 결국 계란밥은 내가 원하던 맛이 나진 않았지만 아직 긴 여정이 남은 나는 최대한 아껴야 한다.
고민한 덕분에 오늘 저녁은 잘 차려 먹었다. 닭다리 구이에 계란밥, 샐러드를 먹었는데 맛은 음, 사실 그냥 그랬다. 닭고기를 조리하려고 팩을 뜯는 순간 약간 비린내가 나길래 좀 불안했는데 역시나, 잡내가 남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냉장고를 그득하게 채워놓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잘 먹고 잘 자는거, 그러니까 영양가 있게 잘 챙겨먹고 따듯하고 편안하게 자는거, 그건 당연한 일 같지만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걸 하루하루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이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정말 중요한 방법이라는 걸 여행이 끝나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크고 깔끔한 마트. 한국 라면은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쌀, 빵, 고기, 야채, 과일 등 고르고 보니 양이 꽤 많았다. 총 가격은 USD 38, 기대만큼 싸진 않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역시 물가가 저렴한 편인 것 같다.
영양가 있게 골고루 차려 먹을 수 있음이 감사했던 저녁 한 끼.
키토의 일상
나는 키토 북부에 머무르고 있다. 명소가 많은 올드시티나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 있는 뉴시티까진 대중교통으로 30분 정도가 걸린다.
매일 아침, 25센트를 내고 지하철에 탄다. 아, 지하철이라곤 해도 땅 속을 달리는 건 아니다. 지상의 전철 전용도로를 달리는 사실상의 버스로, 일반 버스와의 차이점은 칸이 두 개로 길다는 것과 도로 중앙에 정거장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전철이 그렇듯 매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낀다. 길거리에 중국식당이 그렇게 많아도 동양인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요즘 짧은 기간이지만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있다. 중남미에서 총 4개월, 그동안 얼마나 늘겠냐만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건 늘 즐겁고 그 덕에 떠듬떠듬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어서 좋다. 말이 안통하는 곳에서 오래 여행을 하다보면 제일 먼저 자존심이 없어지고 체면도 없어지고 곧이어 주저함이 없어진다. 그러던 중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지껄여댄다.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이 있다. 오래동안 들어왔던, 그래서 내게 수많은 장소와 사람으로 기억되는 노래들... 사람의 머리 속이 세상보다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전철 안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 세상이 있는 걸까? 문득 막연해진다.
북부 키토의 내가 머무는 동네. 주거지역이라 주택과 작은 아파트가 많다. 큰 마트도 있지만 작은 상점들도 많아 괜시리 정겨운 동네다.
Universidad de Central Quito와 근처 도심지
재래시장의 모습
사실상 버스지만 키토의 전철은 (Trolle) 다른 중남미 도시의 그것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도로 중앙에 정거장이 따로 있고 칸도 2개 이상으로 길다. 키토의 대중교통 요금은 전철과 버스 모두 25센트.
키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한 Basilica 성당 근처의 모습
팔레트처럼 모든 색을 담은 풍경, 코토팍시 화산 (Cotopaxi)
에콰도르 키토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코토팍시 화산은 해발 5,800m가 넘는 매우 높은 산이다. 키토 도심도 해발 2,600m가 넘으니 산 아래에만 가도 구름이 눈높이로 내려앉는다.
고지대라더니, 4,800m에 위치한 산장까지 오르는 길은 너무 춥고 힘들다. 칼바람에 얼굴이 애이고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심장이 요동치듯 뛴다.
멀리 산장이 보이기 시작하고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빙하 근처까지 오른다. 화산모래로 덮힌 가파르고 붉은 길 끝에 만년설이 시작된다. 올려다보는 새하얀 정상이 너무나 아름답지만 뒤를 돌아 아래를 내려다 볼 때 탄성이 터진다.
산 허리에 걸렸던 구름이 걷히고 드러나는 끝없는 산세, 고산지대라 나무는 없지만 다양한 색의 대지가 펼쳐있고 그 위로 밝은 파랑색의 하늘이 얼굴을 드러낸다. 세차게 불던 바람마저 멈추면 신기하리만치 고요해지고 팔레트처럼 모든 색을 담은 광경에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코토팍시 국립공원은 여느 관광지들과는 다르게 개인이 방문할 수 없는 곳이다. 해발 3,500m 이상의 자연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에콰도르 정부의 방침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여행자들은 키토 여행사의 투어를 통해 이 곳을 방문한다.
나는 아침 7시에 출발하는 투어에 참여했고 버스는 9시 반 정도에 코토팍시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산 아래지만 고지대인 탓에 이미 구름이 눈높이에 내려앉아있었다.
나무가 없는 고산지대 특유의 황량한 모습. 산세의 색과 형태가 이채롭다
등산이 시작되는 산 바로 아래까지 가는 길은 당연히 비포장 도로다. 군데 군데 길 상태가 매우 안좋은 곳들이 있는데 이런 곳은 대형버스도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구름과 세찬 바람을 헤치고 한참을 오르다 보면 추위에 몸이 움츠려들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러다 멀리 산장이 보이면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해발 4,864m에 위치한 산장.
꽤 전문적으로 보이는 등산객들이 채비를 다지고 있었다.
산장에 걸려있던 태극기. 중남미 여행 중에 한국 국기는 처음 본 것 같았다. 반가움에 나도 한마디 적었다.
빙하에 다다라서 뒤를 돌아보면 나타나는 풍경. 마치 팔레트처럼 모든 색이 담겨있는 듯하다.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 coca tea를 한 잔 마셨다. USD 2의 평범한 차였지만 뜨거운 차 한 모금에 몸이 사르르 녹았다.
등산을 마치고 산 아래 내리막길은 산악 자전거로 내려왔다. 구름 안에서 달리니 마치 비가 오듯 온 몸에 작은 물방울들을 맞았지만 음악을 들으며 내리막을 달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얼마나 오래 페달을 밟았을까. 어느덧 주위 풍경이 평평해진다.
`아찔하게 높은 키토의 전망대, TeleferiQo 케이블카
오늘 아침엔 날씨가 맑았다. 고산지대라 그런지 늘 구름이 많고 비도 간간히 왔던 터라 파란 하늘이 유난히 반가웠다.
점심 쯤 스페인어 수업이 끝나고 나는 바로 TeleferiQo행 우버를 불렀다. TeleferiQo는 피친차 화산의 (Pichincha Volcano) 동쪽 봉우리에 위치한 전망대인데 곤돌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높이는 무려 해발 3,945m. 케이블카를 타는 시작점만 해도 3,117m에 달하고 여기서 정상까지 2.5km의 거리를 18분 동안 운행한다. 이 사실을 탑승하고 나서 안 나는 그 아찔한 높이에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다 큰 어른이 웬만한 리프트나 곤돌라에서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을텐데 TeleferiQo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아찔했다.
왜인지 사람이 없이 휑하다. 덕분에 케이블카를 혼자 전세낼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먼저 차가운 바람이 피부로 느껴진다. 아찔한 높이를 올라오는 동안 이미 도심의 풍경은 저 아래의 점이 되었고 오히려 도시 너머의 화산 봉우리들과 고산지대 특유의 구름이 더 눈을 사로잡는다. 나는 일단 정상 휴게소에서 커피와 핫도그를 먹으며 바람과 아찔한 높이에 차가워진 몸과 마음을 녹였다.
전망대 휴게소에서 핫도그와 따듯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였다
한참 쉬다 나오니 아까보다 푸근해진 느낌이다. 반대편 전망대로 가니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는 쪽이라 더이상 춥진 않았다. 키토의 남쪽 도심과 그곳을 감싼 산세, 그리고 거기 걸려있는 구름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수십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침과 다르게 날씨가 흐려져서 사진이 예쁘게 찍히진 않았지만 찰나의 순간 해가 쏟아지며 멋진 장관을 연출했다. 어쩌면 전형적인 고산지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쌀쌀한 공기에 주머니에 손을 넣게 될 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모두 혼자 타게되어 역시나 오그라든 심장이 여러번 철렁한 후에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