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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키토(2)_스페인어 수업, 일상, 그리고 적도

by 소망이 아빠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 키토에서 듣는 스페니쉬 수업



한 나라의 정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야 요즘은 번역기 한 번 돌리면 뚝딱이지만 저면에 깔린 미묘한 뉘앙스나 사고방식 같은 것들은 클릭 한 번으로 알 수 없다. 지난 10월 10일에 캐나다를 기점으로 여행을 시작했고 스페니쉬를 쓰는 국가를 여행하기 시작한 건 11월 1일, 그러니까 약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채 한 달이 못 된 지난 달 말,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던 나는 인터넷으로 에콰도르 키토의 스페인어 수업을 신청했다.


지금까지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영어 잘하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손짓 발짓을 수없이 섞어야 했고 사실 그 자체도 너무나 즐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아, 스페인어를 조금만 할 줄 알아도 얼마나 이 여행이 풍요로워질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한 마디씩만 더 나눌 수 있었어도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다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대학시절을 미국에서 보내서 영어는 수월하게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덕에 이번 여행 중에만 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유럽이나 북미에서 온 비슷한 처지의 여행자들이었다. 자국어든 아니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에 대해서 깊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내가 여행하고 있는 중남미 현지 사람들과는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지난주, 키토에 도착한 다다음날부터 스페니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간단한 회화 정도만 익혀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몇 번의 수업만에 꽤 머리 아픈 문법도 제법 배우고 있다. 스페니쉬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 주어에 따라 여러가지로 달라지는 동사의 형태, 영어와 다른 발음체계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초보자가 쉽게 익힐 수 있는 언어는 아닌 것 같다.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알면 같은 라틴어 어원의 단어들이 많아서 많이 낯설지는 않다. 어쨌든 이런 특성들 때문에 기초 회화만 익히려고 해도 문법을 반드시 공부해야 해서 요즘은 매일 저녁에 그 날 배운 걸 열심히 머리에 덧쓰고 있다.


그래도 참 즐겁다. 어려서부터 언어 공부를 좋아해서 (수학이랑 과학은 참 싫었지만)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영어 외에도 조금씩 건드린 언어가 꽤 있었는데 오랜만에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보이고 들리는 게 죄다 스페니쉬인 곳에서 지내고 있으니 방금 배운 것도 바로 바로 써먹을 수 있어서 좋다. 길거리 빵집에서 'Pan caliente' (따듯한 빵) 라는 글자를 보고 수업시간에 배운 형용사를 떠올리고 'Yo voy a la plaza de independencia'라고 택시기사에게 더듬거리며 문장구조를 연습하기도 한다. 워낙에 친절하고 웃음많은 사람들이니 못하는 스페니쉬라도 몇 마디 하면 반색을 하며 이것 저것 가르쳐주기도 한다.


4개월쯤 뒤에 남미에서 유럽으로 넘어간다. 그 때까지 내가 익힐 수 있는 수준이야 당연히 한계가 있겠지만 등 한 번 두드리며 '밥은 먹었어?' 묻는 한마디에서 우리네 정을 느낄 수 있듯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소박한 대화에서 그들만의 정과 삶을 엿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수업을 듣고 있는 Quito의 Cristobal Colon Spanish School
강의실에서 여러명이 같이 수업을 들을 걸로 예상했지만 선생님과 1대1로 수업을 받고 있다.

내 선생님은 Gina인데 근처 대학에서 언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교 3학년생이다. 첫 날, 자기는 가르치는 게 너무 좋다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길래 뭔가 믿음이 갔었는데 그만큼 차분하고 꼼꼼하게 잘 가르쳐주고 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늘 배운 걸 하나 하나 다시 읽어본다. 오늘은 특히 새로운 문법과 단어를 많이 배워서 수업시간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었다. 다시 봐도 쉽지 않은 내용 이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건 참 즐겁다.









키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바실리카 대성당 (Basilica del Voto Nacional)


오전에 스페인어 수업을 마치고 Colon 역으로 향했다. 키토는 고산지대라 그런지 금방 피곤해져서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쉴까'도 했지만 한 잠 자고나서 후회할까봐 얼른 Trolle를 탔다. 목적지는 바실리카 대성당 (Basilica del Voto Nacional), 키토 시내를 오며 가며 늘 눈에 띄었던 아름다운 곳이다. 몇 정거장을 지나 Banco Centro 역에 내렸다. 여기서 골목을 따라 잠시만 걸으면 대성당이 고개를 내미는데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아름다움이 물씬 느껴진다. 대성당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있는데 몇몇의 노숙자와 앳된 커플들이 따듯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Colon 역의 모습. 사실 이 정거장은 아주 세련된 편이고 보통의 정거장은 파란 철제 구조물로 휑한 느낌이 난다.
바실리카 대성당으로 향하는 골목길의 모습
왼쪽에 (남쪽) 쌍둥이 탑이 있고 오른쪽에 (북쪽) 뾰족탑이 있다.
뾰족탑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쌍둥이 탑과 그 너머 올드시티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다만 여기에 오르는 외부 철제계단은 가슴을 졸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부는 크지만 그다지 특별하진 않아 보였다.


바실리카 대성당을 처음 봤을 때 파리의 노틀담 성당이 떠올랐었다. 두 건축물의 건축양식이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솟아있는 쌍둥이 탑이나 크고 둥근 모자이크 창문 등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실 성당 내부 자체는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중남미를 여행하며 수많은 성당과 교회에 들렀기 때문에 그저 잠시 기도를 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졌다. 바실리카 대성당의 하이라이트는 뾰족탑 전망대다. 높디 높은 산과 붉은 지붕의 키토 시내 풍경이 성당의 쌍둥이 탑과 함께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1층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성당 지붕 위에 다다르고 거기서 다시 외부 철제계단을 따라 뾰족탑 꼭대기로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이 철제계단이 너무나 가파르고 발을 디딜 수 있는 부분이 넓지 않아서 사람들의 작은 비명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높이의 도시' 키토답게 가슴을 졸이며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대성당에는 두 개의 전망대가 있다. 가슴 졸이며 올라간 성당 북쪽의 뾰족탑이 있고 반대쪽의 쌍둥이 탑 전망대가 있다. 두 곳 모두 아름답지만 난 뾰족탑에서 바라보는 쌍둥이 탑과 그 너머의 키토 올드시티 풍경이 더 좋았다. 특히 쌍둥이 탑 사이로 절묘하게 보이는 Pacedillo 언덕의 마리아 상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키토 올드시티를 바라보았다. 철제계단을 다시 내려가는게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정신 못차리는 커플이 난간에 기대에 사진을 찍고 있다. 보는 우리가 다 불안했다.
쌍둥이 탑에서 바라보이는 뾰족탑. 그 너머로 빌딩이 들어서 있는 뉴시티의 모습이 보인다. 낮고 붉은 지붕의 건물이 빼곡한 올드시티와 상반된 모습이다.

바실리카 대성당에는 멀리서도 보일법한 큰 시계가 여러개 있는데 모두 다 다른 시간을 가르키고 있었다. 처음엔 관리를 안하나 싶었는데 한참 바라보니 일부러 그렇게 놔두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시간이란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 다른건데 모두 같은 시간을 가르키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하겠구나 싶었다.







마리아의 언덕, Panecillo


어제는 마지막 수업날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시작한 공부라 그새 꽤 많이 알게 됐다. 더듬거리는 실력이지만 현지인들과 그들의 언어로 얘기한다는건 '이제 정말 이 곳을 여행하고 있구나!' 하는 희열을 준다. 스페인어는 어렵다. 남성과 여성의 구별과 주어의 종류에 따른 동사의 형태변화 등의 특징이 있어서 기초 레벨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여하튼 수업을 마치고 마지막 수업 기념으로 선생님 Gina와 Old city로 향하는 Trole를 탔다.


Iglesia de San Francisco. 금을 구리 등과 섞어서 치장했다는 내부가 번쩍번쩍거린다.


맛있는 걸 대접하려고 했는데 Gina는 평범한 패스트푸드점으로 날 데려갔다. 22살의 대학생인 그녀는 USD 4 정도의 식사는 자기에겐 비싸게 느껴진다고 했다. 식사를 하고 Panecillo에 가기 전에 같이 Iglesia de San Francisco에 (샌프란시스코 교회) 갔다. 외부는 평범하게 생겼지만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내부는 참 아름다웠다. 이 교회는 학교와 붙어있었는데 Gina는 자기가 나온 중고등학교라며 신나서 이것 저것 설명해주었다. 가르치는 게 좋아서 언어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작은 것 하나도 열성적으로 가르쳐주는 좋은 친구다.


Gina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Panecillo에 올라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Panecillo는 키토 구시가지 (Old city) 남쪽에 솟은 언덕인데 그 위에 시내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마리아 상이 있다. 마리아 상 자체는 조금 으스스하게 생겼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구시가지의 풍경이 아름답다. 그러고보니 안데스 산맥 줄기에 자리잡은 도시답게 키토에서는 전망대에 오른 적이 참 많았다. 택시는 오래되어 보이는 산동네의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 올라갔다. 한 쪽으로는 구시가지가 내려다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바닥에 앉아 노는 아이들이라던지 빨래를 걷는 아주머니 같은 동네의 풍경이 보였다. 문득 언젠가 갔던 부산의 감천 벽화마을이 생각나서 잠시 마음이 아련해졌다.


쇠사슬을 들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사실 아름답진 않다.

키토는 지금 겨울이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15도 이상은 따듯하고 눈도 절대 오지 않지만 구름이 많고 종종 비가 온다. 주로 아침에 해가 쨍하다가 오후에 구름이 잔뜩 끼곤 하는데 Panecillo에서 바라본 풍경도 구름낀 모습이었다. 빽빽한 빨간 지붕과 멀리 보이는 높게 솟은 봉우리들,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이 험한 산골짜기에 어떻게 이렇게 도시를 건설했는지 궁금해진다. Panecillo의 풍경이 좋았던 이유는 역시 Basilica 대성당이 마주 보이기 때문, 나는 구시가지의 풍경을 보며 앉아서 엽서도 쓰고 음악도 듣고 날씨처럼 조금 울적한 오후를 보냈다.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바로 옆에 기념품을 파는 천막이 쭉 들어서 있다.
Panecillo에서 내려다보이는 키토 구시가지. 가운데에 Basilica 대성당이 보인다.









세상의 중심, 적도를 체험할 수 있는 Mitad del mundo



Mitad del mundo는 middle of the world, 그러니까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에콰도르는 적도가 지나는 나라 중 하나인데 워낙 고산지대라 적도에서도 가장 높은 고도를 가진 곳이다. 키토의 마지막 날인 오늘, 느즈막히 집을 나서 Mitad del mundo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Mitad del mundo는 키토 시가지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키토 북쪽에 있다. 그래서 버스요금도 시내에 갈 때와 다르게 40센트를 받는다. 어제 배운 스페인어 노트를 보며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근처에 다다랐다. 작은 동네지만 관광객이 많이 와서 그런지 식당도 많고 활기차 보였다.


Mitad del mundo의 대표적인 장소는 2개가 있다. 하나는 스페인 식민시절이던 18세기에 적도를 기념해 건설한 기념탑이고 (이 탑의 이름이 Mitad del mundo다) 다른 하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Museo Intinan, 태양의 박물관이다. 사실 gps상 '진짜' 적도는 Museo Intinan에 있다. 기념탑을 건설한 18세기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00.00.00위도를 (적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Mitad del mundo 탑은 겉모습은 웅장하지만 실제 적도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진짜' 적도, Museo Intinan으로 갔다.


적도는 북반구와 남반구를 구분하는 선이다. 사실 '지금 여기가 적도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북반구와 남반구, 그리고 적도의 차이점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더 흥미로웠다. 여러가지 실험 중 물붓기 실험이 가장 신기했는데 이 실험은 쉽게 말해 변기물 내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 변기 물을 내리면 북반구에서는 시계방향, 남반구에서는 반시계방향으로 물이 내려가고 이 둘을 구분하는 적도에서는 회전없이 일자로 물이 내려간다고 한다. 우리는 이걸 보기위해 가이드와 함께 세 번의 실험을 했고 몇 발자국 차이지만 정말 물이 다 다르게 내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실험은 못 위에 날계란을 세로로 세우는 것. 적도에서는 특성상 이게 가능해서 많은 방문자들이 못 앞에서 끙끙댄다. 계란을 세우는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적도 인증 도장과 함께 Egg master 증명서를 주기도 해서 나도 한참 시도한 끝에 하나 받을 수 있었다.


적도에서 셀카를 한 장 찍었다.
Museo Intinan에서는 적도에 관한 다양한 실험과 더불에 에콰도르 원주민 Quitus의 생활상을 담은 전시를 볼 수 있다.
Mitad del mundo 탑으로 걸어가던 중 한 식당에서 전통음식 Cuy를 (기니피그 요리) 먹었다. 닭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다시 찾아 먹을 것 같진 않다.
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전 잠깐 구경한 Mitad del mundo 탑. 웅장하게 만들어진 탑이 넓은 공원에 우뚯 솟아 있지만 정작 '진짜' 적도가 아니라는 게 재밌다.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에 가면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몇 발자국으로 북반구와 남반구, 적도를 밟을 수 있는 Museo Intinan에서 또 그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몇 시간 뒤에는 Cuenca로 가는 야간버스를 탄다. 정이 가는 도시 키토, 남미여행에서 대표적으로 꼽히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언젠가 꼭 다시 와서 또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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