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가을, 나는 휴가를 내고 프랑스로 9일 정도 여행을 다녀왔다. 서유럽 국가를 혼자 여행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 참 좋은 기억을 안고 돌아왔었다. 옛 모습을 간직한 거리는 낮이나 밤이나 운치있었고 그 길을 따라 찾아다닌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세계적인 명작들이 넘쳐났다. 동네 미술관에만 가도 그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작품 속의 장소에 직접 가볼 수 있다는 건 내게 너무나 신기하게 다가왔다. 매일 밤낮을 골목골목 돌아다녔던 그 때의 시간이 지금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에콰도르의 작은 도시 쿠엥카는 빠리를 떠올리게 할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고 도시가 크지 않아서 운동화 끈만 잘 묶으면 번거로움 없이 도시의 운치를 즐길 수 있다. 도심 대부분은 Historical district 에 해당되어 아름다운 성당과 건물들이 가득하고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강은 (사실 천에 가깝다) 마치 센느강처럼 시민들에게 여유를 안겨준다. 또 다른 이유?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블록마다 찾을 수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아트 갤러리도 자주 눈에 띈다. 공원이 많아서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잔디밭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노상 카페에서 1달러짜리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럴까? 쿠엥카에는 외국인이 많이 산다. 부족한 스페인어가 딱히 불편하지 않고 외국 레스토랑도 쉽게 볼 수 있다. 오늘 저녁엔 참 오랜만에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었다. 거기서 은퇴 후 4년 째 쿠엥카에 살고 있다는 미국 출신 부부를 만났는데 그분들께 이곳에서의 삶에 대해서 전해들을 수 있었다. 물론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곳 생활에 굉장히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서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해서 얘기해줬는데 '이렇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미국의 기성세대가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의 삶을 택하는 사실 자체는 좋아 보였다. 예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대부분의 미국 아줌마 아저씨들은 '미국 최고' 사상이 만연했고 다른 나라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쿠엥카에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호스텔을 나선 나는 강을 따라 동선을 짜고 걸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천천히 전시를 보고 강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글을 썼다. 따듯한 가을 날씨, 지금 이곳은 계절상 겨울이지만 청바지에 스웨터 한 장이면 낮에는 덥게 느껴지는 정도다. 강을 따라 걸으면 운치있는 교회나 성당이 하나씩 나오는데 땀이 난다 싶으면 잠시 들어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 하루동안 여러 종류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갔는데 쿠엥카를 배경으로 한 현지 예술가의 그림이 매우 평화롭게 와닿았다. 걷다가 목이 마르면 물을 한 병 사고 배가 고프면 Panaderia에서 500원짜리 빵을 사서 들고 먹는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는데도 하루가 빨리 갔다. 생각해보면 그건 쉽지 않은 일 같다. 여유가 넘치면 지루해지기 쉽고 그렇다고 너무 좋고 신이 나면 여유를 갖지 못할 수 있는데 오늘 하루, 참 여유로우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냈다. 쌀국수 국물 때문인지 속도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