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한적한 토요일 점심 때, Lima를 출발한 버스는 Pisco 바닷가 근처에 도착했다. 원래 가려고 했던 최종 목적지 Paracas까지는 또 20분 정도를 가야 하지만 멀리 보이는 바다가 더없이 평화로워 보여 일단 짐을 그대로 지고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Pisco 도심이랑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가끔 오토바이를 개조한 모터 택시가 지날 뿐 길거리에 세워진 차도 한 대 없다. 사람도 없고 바람조차 없어 고요한 순간, 마치 영화 촬영 세트장처럼 현실감 없는 모습에 오직 바다소리와 햇빛많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라 그럴까? 그림자도 짧게 존재할 뿐 바다와 하늘, 밝은 색으로 칠해진 담벼락과 집들이 모두 원색이라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다양한 원색으로 조합된 시골마을의 풍경화, 그런데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캔버스처럼 느껴졌다.
엊그제 본 리마의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파도도 잔잔하고 바람도 없다. 저 멀리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서핑샾에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하늘엔 패러글라이딩이 날아다니던 도시의 바다와는 전혀 다른 시골 어촌마을의 모습이었다. 나는 앞뒤로 베낭을 지고 바다 위로 이어진 낡은 나무 다리를 걸었다. 발이 빠질까 조심하다 이내 느껴지는 바다 비린내... 나는 캔버스에서 빠져나왔음을 느꼈다.순간의 '그림'은 사라졌지만 편안한 시골 정취는 바다처럼 그대로였다.
페루 남부 이카 주에 가면 여행자들의 흥미를 끄는 명소들이 많다. 먼저 주도 이카에 가면 와카치나 사막 투어를 할 수 있고 해안가의 피스코와 파라카스에서는 바닷가 마을의 정취와 함께 바예스타즈 섬, Isla Ballestas에 갈 수 있다. 이카 동남쪽 나즈카에서는 그 유명한 나즈카 라인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게 대표적인 여행 코스다. 도시들이 서로 가깝고 투어 자체에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서 여행자들은 이카 주에서 3~4일 정도만 보내고 동쪽의 쿠스코나 남쪽의 아레키파로 얼른 넘어간다. 마추픽추나 비니쿤카 같은 '왕건이' 명소들이 가득한 곳들이기 때문인데, 나는 크리스마스를 시끄럽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 피스코에서 총 4박을 하며 여유있게 근처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피스코의 둘 째날, 파라카스 항구를 출발해 Isla Ballestas, 바예스타스 섬에 갔다.
20분 쯤 섬을 향해 달렸을까, 때 아닌 구린내가 나기 시작하면 곧 섬에 도착한다. 과거에 섬에 사는 야생조류의 배설물로 비료를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했다는 이곳은 지금은 Poor's Galapagos로 불리며 사람은 살지 못하는 동물/자연 보호구역이다. 때문에 섬에 내려서도 안되고 바다에서 수영을 해서도 안되는, 오직 섬 근처에서 섬에 사는 야생동물들을 바라만 볼 수 있는 곳이다. 철저하게 보호되는 곳이라 그런지 섬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야생동물들이 그야말로 빽빽하게 살고 있었다. 섬 위를 뒤덮은 검은 새들이 순서대로 날아 오르고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절벽엔 바다사자와 펭귄,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각각 제 집인양 자리를 잡고 있다. 야생동물의 보고 갈라파고스 섬에 비할 수야 없지만 짧은 시간동안 잠깐 대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Poor's Galapagos라고 불릴만 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지칠 무렵, 섬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사실 페루는 길거리가 깨끗한 나라가 아니라 관광명소를 빼고는 쓰레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Isla Ballestas의 수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에 그물에 걸린 적이 있어서 상처가 남아있다는 바다 사자 한 마리가 문득 떠오른다.
페루 남부의 작은 어촌마을 피스코, 원래 하룻밤만 잘 생각이었는데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센치함과 긴 여행에서 오는 피로가 겹쳐 여러 날을 보내게 되었다. 할 것도 별로 없는 작은 동네, 바닷가에 가거나 몇 자 끄적이거나 모처럼 낮잠이나 실컷 자거나 하면서 며칠이 지났다. 어쩌면 퇴사 후에 처음으로 느끼는 백수의 일상이었다.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끝내야 할 바쁜 일정이 있었는데, 내가 온전히 내 하루를 만든다는 건 그만큼 부지런하고 강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가 보다. 남이 정한 하루를 사는데 나를 너무 익숙하게 놔두었구나 싶다.
바다냄새는 어디든 똑같은 모양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속초 청호동 바다냄새가 난다.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청호동 바다도, 내가 보낸 일상도, 두고 온 사람도 있겠구나. 오늘은 하루종일 해변에서 끄적거린 덕분에 허리가 아프지만 또 그만큼 힘이 솟는다.
때로는 떠오르는 기분을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바로 말해주고 싶다. 적어두고 나누는 이 기쁜 행위가 아쉬운 날이다.
미란다 해변에서.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녀간 이후로 유명해져서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하는 액티비티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어차피 동쪽으로 가는 루트에 위치한 곳이라 겸사겸사 참여한 투어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고 사막 풍경도 압도적이었다.
페루 남부 이카 주에는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작은 도시들이 몇 개 있다. 바닷가에 있는 피스코와 파라카스, 사막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이카(와카치나), 그리고 나즈카 라인을 하늘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나즈카가 그들이다. 오늘 아침, 예정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던 피스코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낡은 버스를 타고 이카로 왔다. 이카는 이카 주의 주도인데 사실 이카 자체는 볼 게 없지만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사실 마을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와카치나가 주 목적지였다.
와카치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막에 오아시스가 하나 있고 그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선 모습이다. 현지인들이 사는 곳이라기 보다는 숙박 업소나 식당, 여행사 같은 것들만 모여있는 사실상 관광도시다. 나는 이카 버스 터미널에서 모터 택시를 (동남아에서 툭툭이라고 부르는 그것) 타고 와카치나로 갔다. 가까워질수록 도로 양옆이 한산해지고 멀리 Sand dune이 (사막 언덕 or 능선) 보이기 시작한다. 와카치나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거대한 황색의 사막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숙소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8인용 도미토리 하룻밤에 40솔을 부르는 직원에게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을 보이며 할인을 부탁했다. 25솔에 묵기로 하고 4시 반에 출발하는 사막 투어도 같이 신청하고 짐을 풀었다. 피스코 - 이카 구간 버스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어서 1시간 반이지만 몹시 덥고 불편했다. 뭐라도 마시고 좀 쉴까하던 차에 방에 있던 동양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리마로 입국해서 이제 남미여행 4일차라는 대학생 승준씨, 외로웠는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길래 그러자고 하고 나가서 시원한 거 한 잔씩 마셨다.
4시 반이 되어 버기에 올랐다. 운전사를 제외하고 10명이 타는 버기는 사막의 울퉁불퉁한 길을 용맹스럽게 달렸다. 운전사의 운전 실력에 따라 그 재미가 천차만별이라더니, 위아래로 올랐다 쳐박다 하는 운전사 덕분에 10명의 승객들의 입에는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약간 멀미를 느낄 쯤 첫 번째 샌드보딩 포인트에 도착했다. 샌드보딩은 말 그대로 모래 위에서 타는 보드다. 스노우 보드랑 똑같이 생긴 보드를 타고 사막의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가는데 서서 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업드려서 타게 된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가파라 보였다. 내려가다 구르거나 하는 건 아닐까 잠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번 타고 보니 슝 내려가는 게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두번, 세번, 네번... 보드를 타다보니 조금씩 지쳐가고 어느덧 해도 많이 내려와 조금씩 서늘하게 느껴졌다. 버기 운전사는 센스있게도 석양이 아름다운 곳으로 우릴 데리고 가 주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360도 어디를 돌아봐도 몬통 모래사막 뿐이고 태양은 평소보다 크고 붉게 느껴졌다. 10분 정도 바라 보았을까, 그 짧은 시간에 해는 완전히 졌지만 사막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무리 셔터를 눌러봐도 직접 보는 광경을 담을 수 없으니 누군가 물어본다면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와카치나 사막 마을의 아침, 전날 먹은 찬 맥주 때문인지 아침부터 복통이 있었다. 3시간 반 거리의 나스카로 넘어가는 날이었는데 복통도 있으니 천천히 쉬고 저녁 버스를 타야지 했지만 낮 12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가 훨씬 저렴하길래 정신력(?)으로 복통을 극복하고 얼른 터미널이 있는 이카로 갔다. (와카치나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 바로 옆에 있는 이카로 나가는 짧은 길은 마치 읍내로 나가는 느낌이다.)
목적지 나스카, 외계인이 그린 게 아니냐는 거대한 그림들을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나스카 라인이 있는 곳이다. 3시간 반 후, Cruz del sur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분과 함께 나스카 터미널에 내리자 곧 호객꾼들이 들러 붙었다. 대부분 나스카 라인 경비행기 상품을 팔려는 사람들이었는데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을 부르는 것을 보고 그냥 우리끼리 경비행기 공항으로 바로 가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역시, 남미에서 투어는 스스로 하기에 몹시 번거로운 것들만 여행사를 이용하는 게 맞다. 방금 전까지 투어사에서 불렀던 금액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으로 (USD 65) 4인승 비행기에 탑승하기로 했다. 중형차만한 비행기, 조종사 2명을 포함해 총 6명을 태운 이 작은 비행기는 곧 시골 공항의 활주로를 박차 올랐다.
곧이어 탄성. 얼마나 선명하게 보일까 의심했던 나스카 라인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선명했다. 단순한 선과 도형의 조합 정도가 아닌 수많은 종류의 동물과 형상이 너무나 세련된 디자인으로 그려져 있었다. 촌스럽기는 커녕 최고의 디자이너가 공을 들인 고급 브랜드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비행기는 모든 승객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좌우로 크게 선회했는데 덕분에 사진과 동영상을 찍던 나는 금세 멀미를 느꼈다. 30분의 비행, 땀과 어지럼에 푹 젖을 무렵 경비행기는 다시 활주로로 내려왔다. 조종사가 창문을 열어주니 사방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뼛속까지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