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남부 우유니에서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로 넘어가는 날, 새벽 5시 버스를 타기 위해 4시에 잠에서 깼다. 며칠을 머물며 매일 우유니 소금사막의 경치를 즐겼던, 볼리비아의 마지막 도시 우유니를 나서는 발걸음은 못내 섭섭했다. 소금사막의 숨막히는 밤하늘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터미널 근처로 갔더니 Cruz del norte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지도상에는 Terminal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골목을 따라 여러 개의 버스회사 사무소가 늘어선 모습이다.) 짐칸에 여행가방을 싣고 버스에 올랐다. 그동안의 대부분의 버스와 다르게 짐 티켓을 따로 주지 않길래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뭐 어차피 중요한 것도 별로 없으니 별 일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좌석에 몸을 뭍었다.
3시간 쯤 달렸을까, 국경에 다다르고 먼저 볼리비아 출국 심사를 했다. 작은 컨테이너 사무소 앞에 승객들이 줄을 서고 아침 해는 사막답게 벌써 뜨거워지고 있었다. 안타까웠던 점 하나, 아무리 근처에 가게가 드문 곳이라지만 국경 사무소 근처에 있는 작은 노점들의 바가지가 너무 심했다. 1L 물 한 병 가격이 기존 가격에 2~3배가 넘고, 음식을 팔고 있지만 이렇다할 화장실도 없었다. 저 뒤에 가서 해결하라는 말에 간단히 아침을 사먹을까 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볼리비아 출국심사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하여 다시 칠레 입국심사를 받는다. 여기서는 다른 국경과 다르게 버스의 모든 짐을 다 빼서 일렬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승객들이 간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면 국경사무소 직원이 개와 함께 나타나 짐을 검사한다. 몇 분 후 개가 아무 문제 없음을 확인해주면 직원 앞에서 직접 짐을 풀어 잠깐 동안 검사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실 이 날 버스에 한국 사람들이 참 많았다. 어린 친구들도 있었지만 좀 나이가 있어보이는 3~40대 분들도 계셨는데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낙후한 국경사무소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짐을 일일이 검사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분들이 우리 말로 불평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짐 검사하는 개의 모습을 보며 비웃는 모습도 보였고 칠레라는 나라를 무시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 날 뿐 아니라 여행을 하다 보면 현지인들을 무시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호기롭게 현지인들에게 몇 마디 영어로 불평을 쏟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 가서도 그렇게 무시하는 듯한 말을 뱉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냥 인정하고 현지인들을 존중할 수 있다면 좋겠다.
결국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에 도착했다. 뜨거운 사막에 있는 작은 도시 아타카마는 관광 도시답게 여행자들로 넘치고 있었다. 나는 앞뒤로 가방을 메고 마을 중앙 사거리로 가서 숙소를 찾아 다녔다. 칠레의 물가가 살인적이라는 것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칠레 북부 아타카마에서는 여러가지 액티비티와 투어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달의 계곡 (Valle de la luna) 투어와 소금 호수 투어 등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사막 지형에 여러 호수를 가진 아타카마의 지리적 요건에 기인한다. 이 지역은 먼 옛날에 바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막에 소금을 비롯한 미네랄이 많고 호수에도 소금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중동의 사해처럼 사람이 둥둥 뜨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아타카마에서 총 5박을 했다. 그만큼 할 게 많아서 오래 머문건 아니고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가 1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기간동안 아타카마의 수많은 투어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거대한 중남미 대륙을 여행하며 아타카마보다 더 멋진 곳들을 보기도 했거니와 (혹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 볼 예정이거니와) 칠레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투어 선택에 신중했던 것이다.
며칠 지내고 보니, 아타카마 투어는 사실상 교통편이 다다. 입장료는 어차피 따로 내야하고 주로 Half-day 코스라 식사가 포함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 많은데 교통만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면 훨씬 저렴하게 주변 명소들을 둘러볼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타카마에서의 셋 째날, 전날 투어로 다녀온 달의 계곡에 자전거를 타고 다시 가기로 했다. 소금 호수나 온천도 갈 수 있었지만 제일 거리가 짧은 달의 계곡이 내가 가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3,000페소를 주고 6시간 동안 자전거를 빌렸다. 뜨거운 사막이기에 1.6L 짜리 물 한 병과 빵 2개, 팩 주스 2개를 챙겨서 페달을 밟았다.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때문에 금세 입이 마르고 숨이 차올랐다.
달의 계곡으로 가는 길은 줄곧 오르막이다. 뾰족뾰족한 돌 산이 이루는 경치 덕분에 지루함은 전혀 없지만 경사 때문에 자주 쉬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계속 물을 마셨는데 처음엔 혹시 물이 부족할까봐 걱정했지만 다행이 부족하진 않았다. 깍아지는 돌 산이 기세 좋게 펼쳐질수록 길도 그만큼 가파라졌다.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끌면서 올라가야 했는데 사막의 태양은 뜨겁고 그늘도 한 점 없어서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는 게 느껴졌다.
오르막 고비를 넘기면 곧 코요테 전망대가 나온다. 이 곳은 전 날 달의 계곡 투어의 맨 마지막 장소로 해넘이를 봤던 곳이다. 나는 해넘이가 아직 2~3시간 정도 남은 5시경에 갔는데 거짓말처럼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투어사를 통해 찾는 덕분에 해가 지는 시간에 몰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수건을 둘러 메고 가져간 빵과 주스를 꺼내 먹었다. 온 몸이 먼지 투성이였지만 과일 주스와 초콜렛 크로와상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아, 달의 계곡이 달의 계곡인 이유! 사막에 형성된 뽀죡뾰족한 지형이 마치 달의 표면 같아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바다였던 곳이라 소금 성분이 많고 이후 오랜 시간동안 풍화와 침식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현지 가이드가 조금 부족한 영어로 설명한 거라 어디까지가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큰 감흥이 이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여행을 떠난지 얼마 안 되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지만 남미의 대자연을 보는 데 익숙해진 터라 탄성이 터지진 않았다. 하지만 투어를 통해 해질녘의 모습을 본 것도 좋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아무도 없는 달의 계곡을 만끽하는 것도 좋았다. 절벽 께에 걸터 앉아 현실감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빵을 한 입 베어무는 일, 지금은 별 거 아닌 일이지만 언젠가 다시 도시의 삶을 살게 되면 문득 문득 떠오를 것 같다.
이스터 섬에서 돌아온 다음날, 힘차게 숙소를 나섰다. 모처럼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 숙소에서 주는 조식까지 먹으니 발걸음이 가뿐했던 것이다. 이 맘 때 산티아고의 아침 날씨는 매우 상쾌하다. 햇빛은 따듯하고 공기는 시원해서 꼭 갓 꽃이 핀 봄날의 오후 같다. 지하철로 5 정거장 정도 떨어진 버스 터미널에서 (Terminal de Alameda) 내일 탈 버스표를 구매하고 근처의 ‘기억과 인권의 박물관’ (Museo de la memoria y las derechos humanos)으로 향했다.
칠레 역사에도 군부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려 있다. 1973년 시작된 피노체 정권은 1990년 민주정권이 들어서기까지 17년 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3,197명이 정치적인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인권유린이 행해졌다고 한다. ‘기억과 인권의 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이 시기의 과오를 잊지 말고 인권을 지켜나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곳으로 군부독재 정권이 무너졌을 때 세워졌다. 그래서 근간이 되는 메시지도 ‘Nunca mas’(= Never more)다.
박물관의 외관은 매우 크고 현대적이며 깔끔하다. 낮고 평평한 생김새는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한 의도이고 유리벽은 투명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박물관은 군부독재 정권의 시작과 과정, 끝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고 특히 그 과정에서 착취된 칠레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조명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고,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숫자는 3,197명이지만 대부분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988년, 피노체 정권의 통치에 대한 찬반 투표가 있었다. 이 때 ‘No' 진영이 약 55%로 승리해 1990년에 다시 민주정권이 들어섰다. 역사의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어서 전혀 몰랐던 칠레 현대사에 감정이입까지 되는 느낌이었다. 희생자들의 수모에 대한 전시를 보며 마음이 먹먹해졌던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첫째로 역사적인 과오를 철저하게 직시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이 나라의 노력이었다.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사진을 전시하고 지금도 유족들의 신청이 있으면 추가로 전시한다고 한다. 같은 현대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으로서 존경스럽게 느껴진 부분이었다.
두 번째는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칠레사람들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저항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군부정권 시절, 칠레를 벗어난 사람들은 세계 각지에서 칠레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한 눈에 봐도 메시지가 보이는 포스터들이 대표적이다. 칠레 내부에서는 실종자의 어머니, 아내, 자매들이 실종자의 사진을 가슴에 붙이고 그들의 전통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촬영한 영상이 발표되었다. ‘케사’라고 하는 이 춤은 원래 남녀가 함께 즐겁게 추는 칠레의 전통 춤인데 비통한 표정으로 실종된 가족의 사진을 가슴에 붙이고 혼자 춤을 추는 모습이 당시에 강한 사회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실제로 민주정권이 들어선 1990년 3월, 대통령 취임행사가 대규모로 열렸는데 이 때 이 영상 속의 여인들이 같은 춤을 추며 실종자들을 다시 한 번 추모했다.) 마지막으로 1988년 시행된 피노체 정권 찬반투표 캠페인에서 제작된 ‘No’ 진영의 영상도 ‘Yes’ 진영과 대조적으로 매우 창의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을 때리는 창의적인 메시지가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매우 강력하게 다가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곳이지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슬픈 역사를 바꿀 순 없지만 거기에서 교훈을 찾고 발전해야 한다는 이 곳의 근간이 너무나 부럽다. 역사적인 과오라면 그 어느 나라 못잖은 우리나라... 언젠가 내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다음 세대 청년들이 ‘왜 잘못된 것들을 계속 두고 본 거예요?’라고 질문하지는 않을까?
남미에 오기 전 칠레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길쭉하게 생긴 나라라는 것과 이스터섬이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소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통해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라는 사람을 접한 적이 있었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는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이 되는 소설로 파블로 네루다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픽션이다. 소설의 주인공 소년 마리오는 칠레의 국민 시인 네루다를 흠모하다가 그의 전담 우체부가 됨으로서 그와 가까워진다. 소년과 시인은 시와 사랑에 대해 얘기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지만 결국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소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이야기 자체는 픽션이지만 네루다라는 인물과 역사적 배경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슬라 네그라는 바로 그 네루다가 살았던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소설의 배경도 바로 이곳이고 덕분에 남미에 오기 전부터 칠레는 잘 몰라도 그 지명은 익숙했다. 이스터섬의 황홀함이 채 가시지 않은 산티아고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이슬라 네그라 행 버스에 올랐다.
서쪽으로 한 시간 반쯤 달리면 이슬라 네그라에 도착한다. 작은 마을의 첫 느낌은 햇살이 밝다는 것, 그리고 작은 가게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네루다의 집 때문에 유명한 곳이라 그 위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기념품 가게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시원한 바다를 보고 있는 네루다의 집에 다다른다.
*피노체트 군사정권 때 산티아고의 공동묘지에 뭍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그의 유해는 다시 민주정권이 들어선 1990년 이후에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시인의 집은 ‘파격적’이었다. 시인의 우아한 집, 이를테면 조용한 서재에 무수한 책이 꽂혀있고, 안락한 소파 옆에 커피 테이블이 자리한 그런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저 집 전체의 컨셉, 바다를 흠모했던 네루다는 집을 배처럼 꾸몄다. 실제로 집 전체의 구조도 배의 그것을 착안했고 집 안에 꾸며진 각종 장식품들도 실제 배에서 가져온 것들이 많았다. 배 앞머리를 장식하는 여인의 동상이나 운전대, 항해용 망원경 등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마당에는 작은 배도 있는데 “내 집은 해변에 닻을 내린 배다.“라고 말했다는 네루다가 실제로 이 배를 바다에 띄운 적은 없었다.
시인의 집은 창의력과 동심으로 가득했다. “동심이 죽으면 마음 속 ‘그 아이’가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그답게 집 안에는 인형이나 장난감, 곤충채집 표본, 세계각지에서 수집한 마스크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시인이자 정치가로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수집한 흥미로운 것들을 곁에 두고 감상하는 걸 좋아했던 모양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그가 집필을 했던 작업실들, 여러 군데의 작업실을 볼 수 있었는데 안 채의 작은 방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그 곳이 네루다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작은 방은 일단 한 쪽 벽이 유리로 되어 바다가 정면으로 보인다. 그 옆에 책상이 있는데 언젠가 태풍이 지나간 후 바다에 떠있는 나무를 보고 네루다는 ‘바다의 선물’이라고 여기고 얼른 주워 왔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나무로 만든 이 책상에서 수많은 작품을 완성했단다. 이 곳이 특별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빗소리를 감상하기 위해 지붕을 양철로 마감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작은 부분에서 시인의 낭만과 감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곳은 그의 집과 물건을 소개하는 데 집중한 듯 했고 그의 시를 조명하고 설명하는 공간은 없었다. 물론 꼭 글로 옮겨야 시는 아니므로, 그의 손때가 묻은 공간을 통해 조금은 그의 마음과 생각을 느낄 수는 있었다. 한 사람의 시인이 (물론 칠레 역사에 중요한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그 흔적으로 지금껏 영향을 미친다는 게 놀라웠다.
그날 오후,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를 걸으며 사람의 삶 자체가 시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멋진 시를 한 편 읽은 기분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산티아고에 있는 미술관 Bellas artes를 찾았다. 딱히 특별한 것을 찾지 못하고 구경하던 차에 인상적인 예술가를 만났다. 그 표현방식과 색감이 독특하면서도 편안해서 반가웠던 산티아고 출신의 여류화가 모니카 벵고아(Monica Bengoa)였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검색해봤지만 우리나라 포털엔 결과가 나오지 않고 구글에서 이 사람에 대해 조금 읽을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멋진 작품들을 만났다. 기분 좋았던 Bellas artes의 오후.
- 다운타운 빌딩 숲은 꼭 뉴욕 같다.
골목골목 작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커피 한 잔 마시는 기분이 좋다.
-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많이 있다.
- 이 맘 때는 햇빛이 뜨거운 대신 공기가 시원하다. 꼭 봄날 오후만 같다.
- 박물관이랑 미술관이 많다. 그래서 그럴까, 도시 곳곳에 그라피티가 많은데 제법 전문적으로 보인다.
- 물은 더러워 보이지만 작은 강이 흐르고 도시 군데군데 공원이 많다.
- 자동차가 신호를 잘 지킨다. 사람이 건너는 중에도 슝 지나가는 다른 몇몇 도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 한국식당이 많고 물가에 비해 가격이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