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콘(Pucon)은 스위스가 생각나는 예쁜 도시다. 멀리 눈 덮인 산이 보이고 도시가 접해있는 거대한 호수는 눈부시게 푸르다. 이곳은 칠레의 부자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인 모양이다. 호숫가의 산장에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요트와 제트스키는 호숫가의 여유로운 풍경을 완성한다.
푸콘에서 보낸 4일은 거의 완벽했다. 깔끔한 호스텔에는 감사하게도 다양한 국적의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매일 날씨가 좋아서 호수에서 카약을 타기도 하고 계곡 물을 따라 '키 판'에 몸을 실고 표류하는 액티비티 'Hydrospeed'를 즐기기도 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동생 승준이와 자전거를 타고 옆 도시 Villarrica에 다녀오기도 했다.
푸콘은 그냥 호숫가를 산책하고, 장을 봐서 한 끼 해먹기도 하고, 번화가 쇼핑거리를 둘러보며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어도 좋을, 그런 곳이었다. (비싼) 투어 프로그램이 가득하지만 그냥 그렇게 즐기며 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 그래서 언젠가 가족과 함께 다시 오고 싶다. SUV를 빌려 먹을거리와 놀거리를 잔뜩 실고 와 몇 주씩 보내고 싶다.
칠레를 여행하면 이 나라가 지리적으로 얼마나 얇고 긴 나라인지 피부로 느껴진다. 북쪽 사막도시 아타카마(Atacama)에서 시작한 여정은 빌딩이 가득한 산티아고(Santiago)와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를 거쳐 눈 덮인 산봉오리들이 가득한 남쪽의 파타고니아(Patagonia)까지 이어진다. 태평양의 이스터섬(Isla de Pascua)까지 생각하면 이 얼마나 (지리적으로) 다양한 나라인지 실감이 간다.
북쪽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를 거쳐 푸콘까지 마쳤다면 이제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Torres del Paine)를 향해 내려가야 한다. 남극 바로 위, 수많은 섬과 구불구불 복잡한 해안선 덕분에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다. 나는 먼저 푸콘(Pucon)에서 푸에르토 몬트(Puerto Montt)로 가는 버스를 탔다. 푸에르토 몬트는 수산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해안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이번엔 '땅 끝'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반만 더 가면 된다. '땅 끝' 항구도시 푼타 아레나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토레스 델 파이네'의 거점이 되는 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또 한 번 버스로 이동한다. 아! 중요한 것 하나! 이 곳은 물가가 매우 비싸기 때문에 트래킹 할 때 먹을 식재료들을 미리 푼타 아레나스 마트에서 사는 게 좋다.
마침내 며칠에 걸친 이동과 준비 끝에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했다. 거대한 여행가방을 들고 트래킹을 할 순 없으니 꼭 필요한 것들과 구매한 식재료들로 가방을 싸고 나머지는 호스텔에 맡긴다. 사 둔 계란도 다 삶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등산화와 조리도구가지 빌리면 W트래킹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토레스 델 파이네' 행 버스를 타야하니 일찌감치 눕는다. 며칠을 들여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 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 나는 W의 왼쪽 아래 꼭지점에서 시작해 W의 맨 왼쪽 직선 코스는 (Grey 빙하 방면) 건너 뛰고 나머지 W코스를 따라 동쪽으로 2박3일간 걸었다.
온 몸이 젖었다. 땀에 반 정도, 빗물에 또 반 정도, 덕분에 음식으로 가득한 무거운 짐가방이 유독 버겁다. 세 시간 쯤 걸었을까, 오락가락하긴 해도 해가 조금 나기도 했었는데 이젠 대놓고 퍼붓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6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허름날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든든히 먹어 두려고 뻑뻑한 빵을 욱여 넣고 터미널로 향했다. 산 길도 아닌데 벌써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트래킹 코스는 W 모양으로 생겼다. 양쪽 끝 윗부분에 거대한 봉오리들과 빙하가 있어서 W를 따라 트래킹을 하며 경치를 즐기고 주로 W의 아랫쪽에 위치한 캠핑장들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W코스를 다 걸으려면 최소 세 밤은 캠핑장에서 보내야 한다.
나는 W의 왼쪽 아래 꼭지점에서 시작했다. 거기서 왼쪽 위, 그러니까 W의 맨 왼쪽 직선을 따라 올라가면 Grey 빙하가 나오는데 나는 2박3일만 머무르기로 하고 여기는 건너 뛰기로 했다. 빙하는 아르헨티나 모레노 빙하에서 곧 볼 예정이거니와 3박4일간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어서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W의 왼쪽 아래, 즉 나의 출발지점으로 가려면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 페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한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입산 신고서를 쓰고 티켓을 사면 버스는 다시 30분 정도를 달려 작은 선착장에서 멈춘다. 거기서 또 배로 30분, 저멀리 거대한 봉오리와 빙하가 보이는 곳,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에서 트래킹을 시작했다.
거대한 호수를 끼고 걷는다. 몰아치는 바람에 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치고 내 몸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제 빌린 등산화가 익숙치 않아서 발이 아파오고 바람이 불다가도 한 번씩 내리쬐는 햇빛에 땀이 비오듯 한다.
오늘은 W의 가운데까지 걸어서 빙하를 멀리서 바라보고 첫날밤을 보낼 캠핑장으로 향했다. Mirador(전망대)에서 빙하를 볼 때 쯤엔 세찬 바람에 빗방울이 얼굴을 세게 때려 꼭 우박 같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느끼려고 얼굴을 방패삼고 서서 거대한 산과 그 위의 빙하를 바라 보았다.
오늘 묵을 캠핑장 Camping Frances가 곧 나온단다. '30분 전에 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봤으니 곧 나올 때가 됐는데...' 온 몸이 꼴딱 젖은 채 아픈 발을 참으며 조금 더 걷는다. 드디어! 주황색 텐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기쁠 수 있을까, 그런데 더 기쁜 일이 생겼다. 텐트보다 훨씬 비싼 도미토리 침대를 주겠다는 것, 처음엔 돈을 좀 내라는 건가 싶어 의아했지만 따듯한 방과 샤워실, 화장실까지 있는 침대로 무료 업그레이드(?) 해주었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그 기쁨은 절정에 달했다. "와, 진짜 너무 고맙네." 혼잣말을 반복하며 편안함을 만끽했다. 모든 게 너무 비싸서 정없이 느껴졌던 칠레 남부와 파타고니아가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진다. 내일의 긴 여정을 위해 푹 쉴 수 있게되어 너무 감사하다.
짜증이 날 정도로 많이 걸은 날, 토레스 델 파이네의 둘 째날은 '나와의 싸움'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딱 맞을 만큼 힘든 날이었다. 어제는 날이 흐리고 오후 들어선 비까지 세차게 왔다. 그나마 첫 날이라 4시간 정도의 트래킹 끝에 캠핑장에 도착했고 감사하게도 도미토리 침대로 업그레이드를 해줘서 궂은 날씨를 잘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오늘의 코스를 어제 해야 했다면 아마 채 소화를 못하거나 어디가 다쳤을 것 같다. 맑은 날에 총 32km를 9시간이 넘게 걸었으니 비바람 칠 때 어떨지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 거짓말처럼 날이 맑았다. 퍽퍽한 식빡으로 아침을 먹고 캠핑장을 나섰다. 오늘은 두 번째 캠핑장인 Camping Central까지 동쪽으로 20km 정도를 걷는 날이지만, 너무 화창한 날씨에 어제 올랐던 전망대에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흐린 날씨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결국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동쪽 끝인데 서쪽으로 갔으니 한걸음 내디딜수록 내 여정은 그만큼 길어지는 셈이었다.
경치가 기가 막히다. 깎아지는 절벽이 우뚝 솟은 토레스도 웅장하고 ('토레스 델 파이네'의 토레스(Torres)는 영어로 타워(Tower)로 '봉우리'를 뜻한다.) 정면의 빙하 산도 화창한 하늘과 함께 반짝반짝 빛난다. 저 높이 두툼하게 쌓인 빙하와 뾰족뾰족한 산세, 짙어졌다 옅어졌다 하는 산 머리에 걸린 구름까지 어디를 봐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두시간 반이 지나고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맡겨둔 짐을 찾고 가볍게 점심까지 먹으니 12시, 이제 동쪽으로 길을 나선다. 이 때만 해도 몰랐다, 2시간 쯤 뒤 내가 얼마나 지치고 힘들게 될지.
Camping Frances에서 Camping Central까지 가는 길은 최단거리로 16km, 가로로 길게 뻗은 호수 Lago Nordenskjold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야 한다. 호수가 끝나야 목적지가 가까워오는데 오늘 오후, 그 끝없는 호수는 지겨울 만큼 내 오른쪽에 있었다. 앞뒤로 멘 가방에 허리가 뻐근하고 등산화 딱딱한 신발 내부에 발 곳곳이 아프다. 지도 어플 '맵스미' 상의 내 위치는 왜 또 그리 더딘지, 고행과 같은 등산길이었다. 아마 오후 세시쯤 부터 더이상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수시로 물을 마시고 '짝퉁 오레오' Frac을 먹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내 걸음이 너무나 느려진 걸 느끼면서 계속 걸었고 등에 땀이 너무 많이 나서 가방에 든 물이 새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오늘 총 9시간,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래킹의 'W' 아랫부분 가로구간을 걸었다. 얼마나 여러번 지치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수많은 일들,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 추억들, 상상들... 나는 밤 8시가 넘어서 Camping Central에 도착했다. 너무 긴, 너무나 긴 하루였다. 텐트에서 글을 쓰는 지금, 어느새 밖이 컴컴해져서 더이상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허리도, 다리도, 목도 아프지만 방금 먹은 캠핑용 파스타는 꿀맛이었고 이제 침낭에 몸을 뉘일 일만 남았으니 상관이 없다. 자야겠다.
등산화는 빌리는 게 아니었다. 어제부터 아팠던 발은 토레스 델 파이네의 '3봉'을 오른 오늘 만신창이가 됐다. 31km를 걸은 어제, 밤 10시쯤 잠들었는데 정신없이 잔 모양이다. 추울까봐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깊이 자고 아침 8시쯤 텐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지노모토 사의 '아지노멘' 라면은 칠레에서 발견한 특상품이다. 너무 맛있고 금방 익어서 이번 캠핑 내내 참 요긴하게 먹었다. 오늘 아침도 '아지노멘'에 참치캔을 먹고 든든하게 길을 나섰다.
든든함에 업된 기분은 채 30분을 가지 못했다. 발바닥과 새끼 발가락, 엄지 발가락과 발등까지 군데 군데 아파오기 시작했고 유독 경사가 심한 길과 매서운 비바람에 나는 급격하게 지쳐갔다. 편도 총 3시간 반의 코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45분 정도의 급격한 바위길에 내 발은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명을 다했다. 비바람과 추위에 "참 지X 맞은 길이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토레스'는 '타워'를 뜻한다. 즉 국립공원 이름 자체가 '파이네의 타워들'이고 오늘 오른 '3봉'이 바로 그 '토레스'다. 마지막 45분의 돌 길을 꾸역꾸역 올라가면 거짓말처럼 평평한 땅이 나오는데 거기에 옥색 호수가 있고 그 뒤로 '3봉'이 자리한다. 처음엔 뿌연 구름에 '3봉'의 머리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매서운 비바람에 얼마 입지도 않은 옷가지를 최대한 잡아 당기고 몸을 움츠렸다. '3봉'의 풍경보다 드디어 다 올랐다는, 그리고 얼른 바위 뒤에라도 들어 앉아서 바람을 피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몸을 녹이며 가방에 넣어뒀던 초코 과자와 바나나를 꺼내 먹었다. 자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 꼴이 흡사 거지 꼴 같겠다 싶었다.
배를 채우고 몸을 조금 녹이니 다시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구름도 걷혀주어서 더 멋진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말도 안되게 웅장한 3개의 봉, 그 아래로 눈이 쌓여있고 거기서 녹은 물이 옥색 호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돌 봉우리만 있었다면 이런 풍경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호수가 빛나주기 때문에, 타워 앞에서 사람들과의 거리를 조금 벌려주기 때문에, 눈 덮힌 산과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을 이어주기 때문에 비로소 이 곳이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는데 3시간 반이 걸렸으니 내려오는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만신창이가 된 발은 내리막길에서 더 많은 압박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아픔을 참았다. 다시 한 번, 등산화는 빌리는 게 아니다 절대. 여행 끝나면 내 발에 맞는 등산화, 그리고 '아지노멘' 꼭 사야지 다짐하며 산을 내려왔다.
어느덧 저녁 6시, 며칠씩 등산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산에선 시간이 참 빨리 간다. 어디 한 군데만 다녀오면 바로 밤이다. 나는 어제 잤던 Camping Central에 맡겨 놓은 짐을 찾고 찬 물이라도 잠깐 샤워를 했다. 그리고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이동했다. 샤워 후 쪼리 슬리퍼로 갈아 입은 내 발은 그제야 웃는 것 같았다. 2박 3일의 토레스 델 파이네. 산에서 이렇게 오래 지낸 것도, 하루에 2~30km씩 등산을 한 것도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다. 이제 '파타고니아'는 더이상 의류 브랜드나 세상 어딘가의 험한 산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멋졌고 그만큼 정말 힘들었던 곳으로 오래 오래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