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 트랜스미션의 스즈키 지미, 지프차를 닮은 작은 자동차로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여러 번 시동을 꺼트린 끝에 시내를 빠져나갔고 곧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을 가르는 좁을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지도에 표시된 모아이들의 위치를 보고 하나 하나 발품을 판다. 코를 땅에 박고 누워있는 거대한 석상들... 신기했지만 아직은 그들이 서있는 들판과 바닷가가 더 눈부셨다.
누워있는 모아이가 조금 지겨워질 무렵, 우뚝 선 모아이들이 그것도 우루루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모아이가 무수하게 서 있는 Rano Raraku와 15개 모아이가 바다 바로 앞에서 체스 말처럼 일렬로 서있는 Ahu Tongariki가 그 곳들이다. 그러면 ‘내가 진짜 여기에 왔구나.’ 하는 실감과 함께 뜨거운 태양에 지쳤던 몸에 다시 힘이 솟는다.
이번엔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Anakena 해변으로 차를 몬다. 모래사장에 야자수가 가득하고 그 틈을 놓칠까 모아이들이 서있는 작은 해변, 티셔츠를 훌렁 벗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달아오른 몸이 시원한 바닷물에 식을 무렵 해변가에 서있는 모아이들이 다시금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남쪽에 위치한 시내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택했다. 저녁때가 한참 지나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숙소, Mihinoa 캠핑장에 도착했다. 1월의 이스터 섬은 해가 매우 길다. 보통 밤 9시는 넘어야 해가 지는데 덕분에 바다를 보며 라면을 먹을 때쯤 저 머리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바다와 모아이가 가득한 섬 Isla de Pascua, 한 바퀴 돌아본 첫 날 바로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이스터 섬은 유난히 휴가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트로피컬 아일랜드의 정취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물가가 비싸다는 풍문 때문에 출발 전부터 식재료를 바리바리 준비해서 더 그랬다. 아, 캠핑장 텐트에서 잠을 청했으니 내겐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비싼 물가 때문인지 과일이나 계란도 반입이 되어 나도 식빵이며 바나나, 복숭아 같이 크게 재료가 필요 없는 식재료를 대량 구매해서 싸왔었다. 덕분에 매일 아침 캠핑장에서 간단히 밥을 차려먹고 저녁엔 라면에 시리얼 같은 걸 먹으며 캠핑장 앞 바다를 바라보았다. 모아이만을 생각하고 온 이스터 섬에서 더 많은 경험과 추억을 쌓는 느낌이다. 다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끝내 서운하다.
이스터 섬의 넷째 날, full day로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날에 나는 바닷가를 거닐고 스노클링과 낚시를 했다. 지난 이틀 간 렌터카를 타고 섬 구석구석 모아이를 탐방한 덕에 여유있게 트로피컬 아일랜드의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캠핑장에서 해안 길을 따라 시내 쪽으로 걸으며 스노클링 포인트를 찾았고 결국 서핑 숍이 모여 있는 자은 만에서 물안경을 쓰고 호스를 입에 물었다. 너무나 맑은 물! 생각보다 바로 깊어져서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물고기들을 따라 헤엄을 쳤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보고 시원하게 놀고 있는데 흠칫, 검고 큰 물체들이 주변에 다가온 게 느껴졌다.
대낮이지만 물속에서 느껴지는 공포심에 얼른 고개를 돌렸는데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바다 거북이들이었다. 평소에 아쿠아리움에 가면 가장 오래 바라보는 바다 거북이와 함께 수영을 하고 등껍질을 문질러주다니! 기쁨에 겨워 웃음이 터졌고 기포가 일었다.
한참을 헤엄치고 나와 해안가 가게에서 커피와 엠빠나다를 하나 먹었다. 젖었던 비치 팬츠가 말라가고 바다는 눈부시고, 더없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거북이를 찍은 동영상을 계속 틀어 보았다.
오후 4시께, 해가 중천에서 위세를 떨칠 무렵 이번엔 낚시 포인트를 찾아 다녔다. 그 날 아침, 캠핑장에서 일하는 벤자민에게 현지 식 줄낚시와 바늘을 빌린 터라 미끼로 쓴다는 식빵도 챙겨 나왔었다. 파도가 세서 포인트를 찾는데 꽤 시간이 걸렸지만 곧 자리를 잡았다.
식빵으로 만드는 떡밥이라니... 신기해하며 낚시를 시작했다. 작은 녀석들이 빵을 다 뜯어 먹어서 이게 되려나 싶던 찰나, 입이 좀 더 큰 눈 먼 녀석이 걸려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낚시를 하는 탓에 손으로 고기를 잡는데 조금 주저하기도 했다. 곧 동네 꼬마 녀석들이 줄낚시를 들고 나타나더니 내게 스페인어를 할 줄 아냐고 묻는다. 조금 한다고 했더니 빵을 좀 줄 수 있냐고 묻는다. 귀여운 녀석들, 근처에서 낚시를 하다가 미끼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빵을 조금 떼어주고 같이 낚시를 했다. 얼마 없었던 빵이 다 떨어질 쯤 눈 먼 고기 한 마리가 더 걸려들었다.
“Sabes tomar foto?" 사진 찍을 줄 아냐고 꼬마에게 물으니 안단다. 고기와 함께 사진을 한 장 찍고 선물로 그 고기를 주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바다에서 노는 것 같았다. 물안경도 없어 바다에 뛰어들고 갯바위에 앉아 줄낚시를 던진다. 티셔츠는 애초에 입고 다니지 않는 모양이다.
평화로운 이스터 섬의 오후, 시원한 얼음물을 한 병 사서 바다를 보며 마셨다. 고작 4박 5일만 지내기로 했다니... 멋모르고 짧게 일정을 잡은 몇 개월 전의 나를 탓하며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오후의 태양이 작렬하는 길이었다.
모아이를 기대하며 찾은 섬, 그런데 모아이보다 더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북쪽 해안 길을 달리다 차를 멈춘 바다의 경이로운 눈부심이라든지 숙소 근처 바닷가에서 스노클링 중에 만난 바다 거북이들은 오랫동안 눈에 선할 것이다.
물론 모아이상 자체만으로도 여행은 벅찼다. 해가 뜨고 지는 광경이나 대낮의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묵묵히 서있는 모아이는 나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 한없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여럿이 선 모습은 정겹고 홀로 우뚝 선 모습은 강인했다. 그 옛날,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만든 석상들인지 어렴풋이 추정할 뿐 그 사연을 직접 들어볼 순 없으니 그저 그렇게 앉아 느낄 뿐이다.
작은 공항의 대기실, 이 공간마저 이스터 섬답다. 폴리네시아 지붕이 있을 뿐 밖으로 뚫려있어 해가 내리쬐고 바람도 분다. 저기 서 있는 비행기와 작은 모아이, 섬의 마지막 모습들...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든다. 다시 이 멀리까지 올 수 있을까? 그 때 난 어떤 모습일까? 우매한 궁금증을 비웃는 듯 작은 모아이는 미동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