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라는 것
우리 집은 제주시의 중산간 지역인 조천읍 선흘리에 있다. 제주도를 피자 자르듯 4분할한다면 선흘리는 우상측 조각에 속할 테고 그 정가운데 정도에 위치해 있다. 중산간 마을은 바닷가보다 고도가 높고 비구름이 걸리는 특성 때문에 비가 많이 온다. 꼭 바닷가와 구분하지 않더라도 제주도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비가 많이 오는 남부지방에 속하니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만 살았던 나와 아내에겐 '비가 진짜 많이 오는구나.'하는 실감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그런데 변화무쌍하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게 비단 날씨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직장생활을 내려놓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날, 특히 임신한 아내와 한창 말도 많아지고 고집도 세지는 25개월 딸 소망이와 붙어지내는 데에는 즐거움 못지 않은 어려운 감정들도 따른다. 개인의 시간과 가족의 시간 간의 균형이 적절히 맞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작은 일들도 서운함이 되기도 하고 반복되는 육아 상황들에 마음이 자꾸만 작아지기도 한다. 예민하고 날카로워진다.
요며칠 계속된 감기로 어제는 2층 방에서 일찌감치 몸을 뉘였다. 뉘였다기보다 거의 쓰러졌는데 온몸이 바닥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핸드폰도 보지 않고 누운 자세 그대로 9시 전에 잠이 들었고 자정쯤 잠깐 깬 뒤에 다시 아침 6~7시까지 푹 잤다. 오랜만에 잘 잤더니 부었던 목도 조금 개운하게 느껴지고 무엇보다 정신이 맑다. 일찍 잠에서 깬 소망이가 아내를 보채는 소리가 들려와 한 시간 정도 아이와 놀아주고 다같이 아침을 먹었다.
충분히 자지 못했을 아내를 위해 먹지 않겠다는 걸 일부러 아침을 데워 먹이고 (오늘은 내 당번이 아니지만) 소망이 어린이집에 내가 데려갈 테니 먹고 한두 시간이라도 푹 자라고 했다. 잘 자고 잘 먹는 게 건강한 생활의 기본인데 육아는 그게 보장되지 않는 일이니 나나 아내나 더 예민해지고 마음도 작아지는 걸 느낀다.
가족과 (특히 아이와) 일상 대부분을 함께한다는 건 사실 들리는 것만큼 따듯하고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자유로운 개인의 시간이 아쉬워지고, 육아 상황에 따르는 피로도 정말 크고, '내 일'에 대한 목마름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과의 괴리감도 작지 않다. 하지만 11시간의 숙면 끝에 얻은 맑은 정신에서 가장 크게 드는 생각은, 그럼에도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라는 것, 아무리 힘들고 지칠 때가 있어도 우리끼리 더 단단하고 따듯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맑은 정신이 오래 가면 좋겠다.
2023년 9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