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의 “무엇(What)”을, 감각의 표현 “어떻게(How)”로…….
패션은 본질적으로 감각의 영역이었다. 디자이너의 예리한 직관, 시대의 흐름을 읽는 감성, 소재를 만지고 색을 조합하는 미적 감각이 하나의 옷을 탄생시키고 트렌드를 이끌었다. 이러한 정성적인 ‘감(感)’은 패션 비즈니스의 알파이자 지향점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오늘날 패션 비즈니스와 브랜드의 의사결정 과정에는 ‘감’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데이터’이다.
과거 패션업계에서 데이터는 판매 실적이나 재고 관리 같은 정량적 수치에 머물렀다. 하지만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데이터는 이제 소비자의 숨은 욕망을 읽어내고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하는 강력한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패션을 ‘감각’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 ‘데이터’라는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일각에서는 데이터가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해치고 패션을 획일화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종종 나오기도 한다.
과연 감각과 데이터는 서로를 대체해야만 하는 대립 관계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공적인 패션 비즈니스의 미래는 이 두 요소의 창의적인 조화에 달려있다. 감각이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라면, 데이터는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등대와 같다.
데이터를 입은 감각: 더 날카롭고 정확하게
오늘날 패션 현장에서는 데이터가 디자이너와 MD(상품기획자)의 감각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국내 유수의 패션 기업들은 이미 이 똑똑한 파트너와 함께 일하고 있다.
패션대기업 L*가 운영하는 L*몰의 사례는 감각과 데이터의 시너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L*몰은 MD들이 수년간 직접 구축한 23만 건의 코디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고객에게 맞춤형 코디를 추천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베테랑 MD의 스타일링 ‘감각’을 데이터로 정량화하고, AI를 통해 수많은 고객에게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혁신적인 방식이다. 과거라면 소수의 VIP 고객에게만 가능했을 법한 퍼스널 스타일링 서비스가 데이터 기술을 통해 대중화된 것이다. 또한, AI가 상품의 소재, 색상, 디자인을 분석해 상세 설명을 자동으로 생성하면서 MD들은 반복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트렌드 분석, 신규 브랜드 발굴과 같은 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패션 플랫폼 무신*와 W컨* 역시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무신*는 방대한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입점 브랜드들이 더 효율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이는 소규모 디자이너 브랜드의 성장을 돕는 중요한 발판이 되고 있다. 아쉽다면 비싼 수수료율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W컨*은 고객의 구매 이력과 신체 정보를 기반으로 사이즈를 추천해 주는 빅데이터 서비스를 통해 온라인 쇼핑의 가장 큰 걸림돌인 사이즈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처럼 데이터는 ‘어떤 옷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창의적 질문에 직접 답을 내놓기보다는, ‘우리의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을 주며 브랜드의 감각이 더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시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감각이 이끄는 데이터: 숫자에 영혼을 불어넣다
데이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데이터는 과거와 현재의 패턴을 분석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세상에 없던 새로움을 창조하거나 브랜드 고유의 철학과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정성적인 감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만 한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숫자와 그래프 속에서 의미 있는 흐름을 발견하고, 이를 브랜드의 정체성과 결합해 매력적인 스토리로 풀어내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예를 들어, 데이터 분석 결과 ‘친환경 소재’에 대한 검색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브랜드의 ‘감각’에 달려있다. A 브랜드는 기능성을 강조한 테크웨어에 친환경 소재를 접목할 수 있고, B 브랜드는 자연의 색감을 담은 서정적인 디자인으로 풀어낼 수 있다. 데이터는 ‘무엇(What)’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어떻게(How)’ 표현할지는 감각의 영역인 것이다.
결국 데이터는 시장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들려주는 스피커이며, 그 목소리를 듣고 우리 브랜드만의 고유한 언어로 노래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감각과 철학이다.
조화로운 협업이 선사하는 새로운 인사이트
감각과 데이터의 조화는 단순히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이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초 개인화된 고객 경험: 고객 개개인의 취향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자이너의 감성이 담긴 상품을 추천하여 구매 전환율을 높이고 브랜드 충성도를 강화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의 실현: 정확한 수요 예측 데이터를 통해 불필요한 재고를 줄이고, 고객들이 선호하는 취향의 데이터를 활용해 가치 있는 소비를 이끌 수 있다.
새로운 시장 기회 발견: 데이터는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틈새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디자이너의 감각은 그 시장을 매료시킬 새로운 컨셉을 창조할 수 있다.
패션의 미래는 더 이상 ‘감각이 먼저냐, 데이터가 먼저냐’의 이분법적 선택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영감과 데이터의 냉철한 분석력이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감성과 디지털 기술의 아름다운 협업, 이 조화로운 듀엣이 앞으로의 패션비즈니스를 더 풍성하고 가치 있게 진화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