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속에서 쓰는 얼굴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친구를 만날 때와 직장 상사를 대할 때,
가족 앞에 있을 때의 모습은 미묘하게 다르다.
같은 ‘나’이지만,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표정과 태도는 달라진다.
카를 융은 이러한 사회적 모습을 "페르소나(persona)"라 불렀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뜻한다.
배우가 무대에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가면을 쓰듯,
인간도 사회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만의 가면을 갖추게 된다.
페르소나는 위선이나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에 가깝다.
예컨대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는 차분하고 신뢰감을 주는 페르소나를,
교사가 교실에 들어설 때는 학생을 이끄는 권위적 페르소나를 자연스럽게 입는다.
이 가면이 없다면 사회적 관계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페르소나가 자아 전체와 동일시될 때 발생한다.
융은 사회적 역할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인간이 자신의 다른 측면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얼굴만을 ‘진짜 나’라고 믿게 되면,
무의식 속에서 억눌린 욕망과 감정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페르소나는 인간이 사회에서 기능하기 위한 창(窓)이자 가면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너머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아의 다른 층위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왕도(royal road)”라고 불렀다.
낮 동안 억눌린 욕망과 감정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밤의 꿈을 통해 변형된 형태로 드러난다.
그는 이 과정을 압축과 전치라는 심리적 기제로 설명했다.
서로 다른 기억이 하나의 장면으로 합쳐지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욕망이 다른 사소한 상징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은 융의 그림자와 교차한다.
융은 사회적 가면 뒤에 남겨진 부분을 그림자라고 했고,
프로이트는 그것이 꿈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난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두 사람 모두 사회적 자아가 감추는 영역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닿아 있다.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낮의 삶에서 밀려난 정서가 다른 방식으로 귀환하는 장치다.
이 귀환을 통해 자아는 균열을 드러내고,
무의식은 자신의 몫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