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베니스에서 인터뷰를 했고 그와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학교 교수들 중 만나기 전에 먼저 메신저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마르코이기에 나는 그날 그를 낯설지 않게 느꼈다. 그는 조용히 말했고 말마다 여백이 있었다. 나는 그 여백을 좋아했다. 그가 인터뷰 끝 무렵 조용히 말했었다. “로마에 오면 꼭 연락 줘요. 혼자 걷기엔 너무 풍성한 도시예요.” 그래서 나는 약속을 기억했고 로마에 도착하던 날 아침, 마르코가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숨을 쉬었고 내 안에 남아 있던 상처들이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조용히 진정되었다. 그는 찻길을 건널 때면 사람들의 통행을 먼저 살폈고 혹시라도 눈높이에 걸린 나뭇가지가 있으면 앞서가서 조용히 치워주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로마식의 매너인가. 그런데 그럴 만했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은행장이셨고 그는 어릴 때부터 예의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다정함이 훈련된 절제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안에서 묘한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모든 사람의 태도는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말 비늘처럼 얇은 순간순간에 대한 배려와 상대를 애정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겹쳐져야 비로소 빛이 나는 것이라고 나는 그날 그의 손끝에서 그 빛을 보았다.
우리는 바티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사람이 많았고 발걸음은 자꾸 흩어졌다. 나는 그를 잃어버릴까 봐 조용히 그의 옷자락을 잡았고 장난처럼 속삭였다. “I'm your tail.” 그는 뒤를 돌아보다 웃었고그 순간부터 그가 내 앞을 걸을 때마다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농어를 먹기까지 식당 여섯 군데를 돌았고 그 여정이 점점 귀찮아지기보다 마르코라는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해가는 시간이 되었다. 식당에 도착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고 내 상의를 받아 조심스럽게 의자에 걸어주었다. 우리는 레몬 소다수로 목을 축였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진중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그는 볼까지 발그스레 물들이며 수줍게 말했다. “다 그렇지는 않고… 마리한테만, 조금 더 그런 것 같아요.”
농어가 나오기까지 삼십 분. 그는 물이 비는 내 잔을 채워주었고 나는 그의 입가에 묻은 양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끝은 섬세했고 핀셋과 포크를 들고 가시를 하나하나 골라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반을 갈라 내 접시에 올려주며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었다. 나는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넌 나의 영웅이야.” 그는 기쁜 듯 웃었고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식사가 끝나고 그는 쿠키와 초콜릿을 주문했다. 나는 문득 궁금했다. 그는 왜 항상 나와 같은 음료를 시킬까. 그래서 나는 물었다. “마르코, 왜 맨날 나랑 같은 거 시켜요?” 그는 잔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대답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이고 싶어서요.” 그 말은 한 줄의 시처럼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작은 콘서트를 보기로 했다. 농어를 먹으며 그는 프로그램을 설명해주었다. 바로크의 현악 삼중주로 시작해서 오페라 아리아 편곡과 현대 피아노 솔로까지.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곡 하나하나를 말할 때마다 눈빛이 깊어졌고 나는 어느새 음식보다 그가 말하는 음악의 풍경을 먼저 음미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로마 첸트로의 골목들을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걷는 것이 좋았다. 돌길이 거칠어지자 그는 내 신발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발 바꿔 신을래요? 내가 굽 있는 것도 괜찮아요.” 나는 웃었고 그는 말없이 내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우리는 작은 분수 앞에서 잠시 멈추었고 조용한 성당 앞을 지나며 자동으로 걸음이 느려졌다.
마르코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내 옆에 섰다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요?”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말은 아니었지만 순간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사람은 결국 다 고독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그 고독이 잠시 맞닿는 일이라고 느껴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란 게 조금 놀라워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마리는 겉으로는 따뜻하고 밝아서요. 그런 사람이 고독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걸 들으니까… 갑자기 더 궁금해졌어요.” 나는 그가 진심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는 걸 느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저는 사람의 신념이나 슬픔 같은 걸 듣는 게 좋아요. 음악보다 더 정직한 진실들이 거기 있으니까요.” 그 순간 나는 그와의 대화가 하나의 연주처럼 들렸다.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게 천천히 나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그 말들 사이에 담겨 있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이라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붉은빛이 천천히 건물의 지붕을 스치고 하늘은 보랏빛과 금빛 사이에서 부드럽게 흘렀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고 그가 어깨 너머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빛은 음악으로는 잘 표현이 안 돼요. 너무 천천히 너무 조용하게 바뀌니까.”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지금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시간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그날 로마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고 내 마음에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푸치니를 닮고 싶어 기른 콧수염의 남자와 젤라또를 입가에 묻히고 환히 웃던 여자의 하루. 우리는 로마의 골목을 천천히 걸었고,서로의 마음 속 깊은 고독까지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이 사진 속 웃음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