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이 세 가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 세 가지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과 희생 그리고 과학이다. 사랑이란 아무 조건없이 상대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절대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남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사랑하는 척 흉내만 내다가 만만한 사람 앞에서는 그 흉내조차 내지 않는다. 따라 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희생이란 자기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위해주는 것을 말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희생이란 그저 멍청한 짓에 불과하다. 자기 밥그릇도 못 지키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개념은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 편견 없이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과학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나르시시스트들은 이 과학적인 사고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문제의 인과 관계를 분석하지 못하고 어떤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지도 못한다. 만일 나르시시스트가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한다면 문장 몇 개를 통째로 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으면 의심부터 한다. 저 사람이 나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러는걸까? 무슨 목적이 분명히 있어서 그러는 걸 거야.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 해도, 심지어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라 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방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면 두려움에 쌓인다. 무슨 함정이 있는지, 나중에 이 친절을 다시 요구하지는 않을지, 계산이 맞아떨어질 때에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분명히 상대에게 사악한 계산이 깔려 있을 거라고 믿고, 분명 자기는 위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갑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한다. 상대의 친절은 곧 자기의 세계관을 흔드는 일이자 느닷없는 공격이며,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기를 멈춰야 한다. 어느새 우리는 단지 호의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되고, 그들은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서 상대방이 호의를 베푸는 것이 정말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나르시시스트는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어리석은 바보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설마 나한테 바라는 게 없는데도 저렇게 호의를 베풀 정도로 바보란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희생이나 헌신은 그저 약점이자 어리석은 짓으로 보인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종종 잘 당하는 에코이스트들은 이들과 반대다. 에코이스트들은 매사에 자기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일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법을 찾아내는 등의 과학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나르시시스트와는 반대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을 돕기 위해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뢰, 정직, 정의 등 보편적 원칙들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비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눈에는 이 에코이스트들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만 보인다. 사람들에게 붙어서 아양과 아부를 떨거나 자신이 지배하며 군림하거나 둘 중 하나로 살아야 하는데, 이 에코이스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이다. 자신이 하나하나 간섭하지 않으면 세상물정 모르는 에코이스트가 어디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에 늘 예의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뭐든 제대로 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관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르시시스트는 에코이스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하나 다 뜯어고치려 든다. 늘 가르치고 지적하고 변화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다 상대를 위한 일이고 선한 일을 한다고 정의감까지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감은 사람을 괴롭히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정의감이란 쾌감 말이다.
무지는 여기에서 온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런 관계를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들의 착각은 단지 관계를 왜곡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는 신념 안에서 타인을 교정하려 들고, 그것이 곧 정의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정의는 타인의 고통 위에 서 있고, 타인의 고유한 모습을 말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결국 그들은 상대를 돕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세계를 허물고 자신이 설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런 주종관계가 생각외로 많다. 이 나르시시스트는 대화로, 설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악화되고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상대는 그것을 해결의 시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 대한 통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더 많은 반발과 왜곡, 피해자 코스프레로 이어질 뿐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당하기 전까지 에코이스트들은 다른 사람은 모두 자기처럼 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 믿는다. 그저 남을 괴롭히는 자체를 즐기는 악의적인 사람들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살다가 나르시시스트를 만나게 된다.
계산 없이 베풀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긴 한다. 비율상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사기꾼들이 제일 사람을 악랄하게 써 먹는 함정이다.
잊지 말자. 인간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선해보이고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긴 시간 합리적인 의심을 하면서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가려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대외적인 명성이나 인지도 등 눈에 보이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사람의 성격이나 패턴, 의사결정방식, 문제 해결 방식 등을 잘 관찰해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기반으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관계는 만날 때 디폴트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헤어졌을 때 그리고 꼭 사계절을 지내본 후 설정하는 것을 오십 년 넘게 지키며 살고 있다.
이런 착취와 지배는 안타깝게도 사회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가정, 학교, 교회, 직장 심지어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발견된다.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어 약한 이들을 조종하고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자신의 의도를 선한 것처럼 포장해가며 권력의 쾌감을 누리는 이들. 이들은 결코 소수라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거짓의 구조를 꿰뚫어볼 수 있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진짜 선함은 조용하며 과시하지 않고, 진짜 사랑은 조종하지 않는다. 진짜 정의는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그 구분을 지혜롭게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키는 최소한의 방패이자, 진짜 관계를 지켜내는 힘이 된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들이 감추려 한 진실은 언젠가 말없이 무너진다. 우리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아니, 속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진짜 관계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