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건, 어쩌면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돌아온다는 약속도 없고, 끝이 있다는 보장도 없이 그저 '있다'는 것만으로 버티는 시간. 사람들은 자꾸만 믿음을 확신이라 부르지만 나는 안다. 확신은 말하고 믿음은 견딘다는 걸. 그래서 믿음은, 침묵이다. 비어 있는 자리에 끝까지 머무는 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고요한 결심이다.
우리는 너무도 믿음을 쉽게 써 버린다. 사실 기다릴 용기도 없는 상태에서 쉽게 '믿는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기다림 없는 믿음은, 어쩌면 종교처럼 보이기만 하는 모양일 뿐이다. 내 안에 뿌리내리지 않은 선언. 그런 믿음은 첫 바람에도 쓰러지고, 첫 고요 앞에서도 흔들린다. 진짜 믿음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도, 그 자리에 다시 앉는 것이다. 결과가 오지 않아도, 응답이 닿지 않아도, 그 자리에 나를 내려놓는 것.
믿음은 뻔한 예상되는 결과를 바라는 일이 아니다. 불확실한 일이라도 가치를 두고 신념을 지키는 일이다. 어쩌면 다른 이와의 약속이 아니라, 나와의 약속일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외롭다. 누가 함께 걸어주지 않아도 계속 걷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말이 적다. 침묵이 깊고, 눈빛이 선명하다. 그는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끝까지 가겠다고 말한다. 그것이 믿음의 온도다. 확신의 불꽃은 눈부시지만, 믿음의 불은 오래 간다.
우리는 무수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믿지는 않는다. 상대를 수없이 의심하고, 자기가 원하는 상으로 상상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조바심을 쏟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채 내가 만든 환영 속에 가둔다. 그러다 조금만 다르면 실망하고, 끝내는 그 실망을 ‘배신’이라 부른다. 그러나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사랑보다 느리고, 사랑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믿음은 확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이 그 사람일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봐주는 일이다.
사랑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믿음, 사랑보다 늦게 도착하는 마음이 믿음인 것이다. 사랑이 마음을 끌어당긴다면, 믿음은 마음을 묶는 끈이다. 금세 풀어지지 않고, 쉽게 잊히지도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고, 거짓말처럼 어떤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사람의 불안도, 나의 망설임도, 그 모든 떨림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일. 믿음은 사랑이 휘청거릴 때도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용기다.
이별의 순간은 사랑이 변질되었다기보다는 믿음이 깨졌을 경우가 더 많다.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마음, 나도 그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 조용한 약속이 산산이 부서질 때 사람은 결국 등을 돌린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믿음은 관계를 지탱하는 구조다. 그 구조가 무너지면, 아무리 아름다웠던 감정도 그 위에서 더는 자라지 못한다.
믿음이라는 구조물을 짓는 것은 어느 한쪽이 아니다. 이것은 쌍방이어야 구조물이 생겨난다. 한쪽만 짓고, 다른 쪽이 허물어버린다면 그건 구조물이 아니라 환영에 가깝다.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감싸주며, 의심보다 이해를 먼저 건넬 때, 그제야 벽돌 위에 벽돌이 얹힌다. 말로가 아닌 태도로, 설명보다 기다림으로, 마침내 믿음은 생겨난다.
믿음은 그 자체로 건축이다. 시간과 신뢰, 오해와 화해, 기다림과 침묵, 그 모든 것이 교차하며 단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서로가 머물 수 있는 마음의 집. 믿음이라는 벽돌이 교직될 때 관계라는 건축물이 완성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빨리 발을 뺀다. 기다림이 불편하고, 확신 없는 불안이 견딜 수 없어서 벽돌이 아직 굳기도 전에 등을 돌린다.
그렇게 놓친 인연들이 기억의 편린처럼 쓸쓸한 아침을 맞이한다. 잊었다고 여긴 마음의 구석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 한때의 웃음, 그리고 믿고 싶었던 순간이 다시 고개를 든다. 믿음은 사라져도 흔적은 남는다. 건축물은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 살았던 감정은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서성인다.
그래서 어떤 아침은,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한 후회의 온도로 시작된다. 그리움은 때로, 끝내 지켜지지 못한 믿음의 뒷모습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벽돌을 얹고 있을까 생각하는 아침이다. 무너진 것들의 자리에 다시 서서 또 한 번 마음을 쌓아야 하는 오늘, 나는 다시 묻는다. 믿음이란 무엇이었는가. 그토록 바라던 확신이 아니라 매일의 기다림으로 지어가는 나만의 구조물.
언젠가, 내가 지금 쌓고 있는 이 조용한 신념이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기를. 누군가가 주저앉았을 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벽이 되어주기를. 믿음은 나를 위한 것이면서도 결국,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음을 문득 깨닫는 아침이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이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믿어야 할까. 사람인가, 상황인가, 내 선택인가. 그도 아니면, 어제보다 나아진 내가 오늘은 조금 더 다정할 거라는 그 조용한 가능성인가. 믿음은 거창하지 않다. 때로는 커피를 내리는 손의 온도, 묵주 한 알을 넘기는 고요한 움직임, 잠시 들른 햇살 하나에도 깃든다. 나는 오늘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 질문이 하루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을 품은 채 걷는 나를 믿기로 한 하루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