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어가는것

by 마르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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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벽에 달력 한 장 더 붙이는 일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빠지는 일도 아니고 주름 하나 더 늘어나는 일도 아니다. 그건 아주 오래된 노래를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게 되는 일이고 익숙한 향기 앞에서 갑자기 고개를 돌리게 되는 일이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려 했고 누군가에게는 잊히는 것이 두려워 목소리를 키우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조용히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같이 걷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는 꽃이 피는 소리보다 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기다림보다는 배웅을 더 많이 하게 되고 기억보다는 잊어주는 일이 더 따뜻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세상의 이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그 이치 속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쯤인지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한다.




젊을 땐 모든 일이 시작 같았다. 계절도 관계도 사랑도 모두 시작이었다. 봄이면 벚꽃이 폈고 사랑하면 영원할 줄 알았으며 이별은 어딘가 모르게 반칙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이제 마무리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고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인연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고 어떤 대화는 하지 않아도 마음이 다 전해진다. 예전에는 말하지 않으면 오해받을까 두려웠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아야 지킬 수 있는 거리도 있다는 걸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어둠이 깃든다는 것 그 어둠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 한쪽에선 여전히 한 번쯤은 무모해지고 싶지만 몸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 때 나는 그 고개 젓는 몸의 말을 이해한다. 그건 순응이 아니라 평화이고 포기가 아니라 분별이고 자책이 아니라 용서다.




어릴 적엔 용서가 관대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 용서는 어쩔 수 없음에서 오는 깊은 사랑이라는 걸 배운다. 남을 용서하기보다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진짜 편히 숨 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나는 나를 덜 비판하고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슬픔을 굳이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이제야 진짜 나이 들어 가고 있는 거라고 나는 오늘 내 거울 앞에서 비로소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 세상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칼날이 이제는 그저 가느다란 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실이 어느 날 뚝 하고 끊어지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으리라. 이미 수많은 안녕을 지나왔고 또 수많은 사랑을 품었기 때문이다.




삶은 언젠가부터 ‘무엇을 하겠다’에서 ‘무엇을 하지 않겠다’로 옮겨갔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있는 것을 남기고 싶어졌고 소유보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졌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늦지는 않았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다는 평화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비로소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고 다시 용기 내어 나를 껴안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대신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다.




나는 여전히 울고 실수하고 때때로 후회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이 들어 간다는 증거라면 그마저도 고맙다. 이제는 살아온 해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것을 알지만 그 남은 날들을 더 단단하고 향기롭게 피워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천천히 고요하게 나이 들어 간다. 그리고 나는 안다. 삶은 점점 더 가벼워지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깃드는 일이란 것을.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는 말했다. “삶이란 끊임없는 ‘지연된 죽음’이 아니라, 끝없는 ‘되새김의 존재’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그래서 끝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를 배우는 일이 아닐까. 그토록 어리석고 찬란했던 나의 한때가 이제서야 이해되기 시작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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