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불빛은 칼날처럼 선명했다".
이십여 년 전, 수술대 위의 한 줄기 빛 아래서 나는 숨을 고르며 묻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내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무엇이며, 어떤 결심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지. 그 물음은 지금껏 내 안에 맥박처럼 살아 있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게 된 순간, 나는 삶을 닿을 수 있는 언어로 엮어 내 안에서 다시 흐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나는 이미 오래된 기억 속에 글을 품고 있었다. 세 살 무렵, 나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연필을 쥐었다. 흰 종이 위에 처음으로 눌러 쓴 글자들은 삶을 배우는 놀이였고, 그 시간은 나의 첫 번째 일기장이 되었다. 새벽빛이 감나무 가지에 닿을 때, 우리는 함께 글자를 짚었다. 마당의 참새, 신발끈 위의 꿈, 작은 일상들이 글이 되어 나의 손끝에 남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시절 호족반에 마주 앉아 정갈하게 칸이 나뉜 국어 공책에 침 묻힌 연필심으로 눌러 썼던 그 문장 하나를 다시 꺼내는 것과 같다. 나는 글을 쓰며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흐르며 어디에 멈출지를 가늠하게 되었고,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다짐한 것이 과연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글쓰기는 나에게 기도문이 되었고, 조용한 묵상의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미사여구로 마음을 포장하고 싶은 유혹, 감정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을 덜어내고 날것 그대로의 내 모습을 써 내려가기까지, 나는 긴 시간과 몇 번의 포기를 견뎌야 했다. 암 수술 이후 나는 감사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의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작은 빛 하나를 붙잡아 적는 일은 어느덧 이십 년의 시간을 품었고, 내 삶의 또 다른 척추가 되어주었다. 언젠가 책을 낸다면, 나는 그 노트의 페이지들을 정성껏 묶어 조용한 진심으로 건네고 싶다.
쓰다 지우고, 또 구기고, 다시 펴서 적은 날들이 허공에 떠다닌다. 그것은 실패한 문장들이 아니라 내가 나의 진심을 붙잡기 위해 흘린 수많은 흔적들이다. 더 정직해지기 위해, 마음 깊은 곳을 꺼내기 위해, 나는 문장의 색을 지워가며 괴로운 밤을 지나야 했다.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한 밤들, 그 밤에도 나는 끝내 펜을 들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반듯하게 정리된 원고가 아니라, 여러 번 구기고 다시 편 종이에 삐뚤빼뚤 하나씩 적어 내려간 문장을. 그 문장을 위해 나는 내 언어를 단속하고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때로는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의 자리를 두고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검열을 거듭했다. 어떤 날은 문장이 생각보다 앞서 달려 나갔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느라 애썼다. 오랜 훈련 끝에 나는 알게 되었다. 더 쓰는 일보다 덜 쓰는 일이 더 어렵고, 침묵을 견디는 일이 말보다 더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도 어렵다. 말과 침묵의 균형을 글 속에서 어떻게 그려낼지. 어떤 문장은 말을 줄여야 깊어지고, 어떤 진실은 침묵으로 더 크게 전해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경계를 망설이며, 배워간다. 때로는 걱정도 든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썼다 해도, 그 진심이 누군가에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은 다정한가, 이 표현은 누군가의 어깨를 누르지 않는가.
이제 나는 안다. 이 글이 내 안에만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 글은 나를 떠나 누군가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을. 처음엔 나의 고백이었고 나의 기도였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이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 마음에 오래도록 켜두었던 이 등불 하나를 이제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 조용히 놓아주고, 그 곁을 천천히 걸어 나와도 괜찮지 않을까. 나의 글이, 나의 문장이 그 마음을 비춰줄 수 있다면 더는 나만의 것이 아니어도 좋다.
등불 하나, 문장 하나. 그것이면 충분하다. 내가 이 글을 써온 이유로 이미 넘친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한 문장을 더 꺼낸다. 누군가의 밤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작은 등불 하나를 다시 조심스레 심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