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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당신이라는 싯점

우리는 왜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

by 마르치아
어떤 사이들은 긴 침묵을 품은 채 오래 간다.




말없이 지나가는 계절을 몇 번이고 함께 겪으면서도, 정작 마음속에 쌓인 말들은 끝내 꺼내지 못한 채, 그저 밥을 먹고, 물을 건네고, 안부를 묻는 일상 안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또 복원된다. 말이 없었던 사이가 아니라,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꺼낼 수 없었던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말이 많으면 마음이 깊은 줄 알지만, 그 말들이 전부 다 진심은 아니었던 순간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말의 함정 속에서 서로를 미루고,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가끔, 왜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돌아본다. 그날 당신의 눈빛이 그렇게 무너져 있었는데 왜 나는 그저 웃어버렸을까. 왜 당신의 말끝에 숨어 있던 진심을 더 묻지 않았을까. 왜 그토록 많은 말 중에, 우리는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말을 건네지 못했던 걸까. 말 한마디면 달라졌을까.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상처만 길게 남았을까. 아무리 되짚어도 답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여전히 그날을 품고 산다. 침묵의 모서리에 긁힌 듯한 마음을 그대로 둔 채.



우리는 말보다 눈치를, 감정보다 예의를 택했고 그래서 끝끝내, 서로의 마음을 건너가지 못한 채 사이좋은 타인처럼 남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방식으로 서로를 잃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그 문장들, 그 밤마다 머릿속에서 수백 번 되뇌었던 그 말들, 이제야 용기를 내어 써 내려간다. 무대 뒤에서 외운 대사처럼, 그러나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 없었던 그 문장들을.



그땐 나도 너무 두려웠다. 혹시라도 내가 당신의 상처를 더 깊게 파고드는 건 아닐까, 내 말이 칼처럼 날카롭게 꽂히진 않을까, 당신의 삶에 내가 감히 발 디딜 자격이 있을까. 그런 수많은 물음표들 속에서, 나는 끝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 버렸다. 말은 준비되지 않은 마음 앞에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야, 말하지 않음이 때론 더 아픈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가장 고요한 침묵이, 가장 큰 외면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마음은 결국 없었던 것이 되고 사랑한다는 말은,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무수한 말 대신 ‘괜찮아’라는 말 하나로 서로의 진심을 덮었고, 그것은 조심스러운 배려가 아니라 더 이상 건너가지 않겠다는 담담한 포기였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매번 그 자리를 돌고 돌며 망설였다. 한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만 보았고 결국엔 ‘괜찮아’라는 말로 모든 진심을 감췄다. 그 말은 정말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이 마음을 말로 꺼낼 수 없어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다. 그 침묵이 얼마나 큰 외로움이었는지, 나도 그제서야 느꼈다. 당신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내게 말했어야 했다. “괜찮냐”고, 정말 괜찮은 게 맞냐고.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당신에게 묻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오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만큼 서로를 아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술 끝에서 맴돌다 삼켜진 말들은 언젠가는 이렇게 글이 되어 조금 늦게라도 도착하는 것이다. 말 대신 바라보던 순간들, 말 대신 내민 손길들, 그 모든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날부터 줄곧, 당신의 괜찮아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당신의 침묵을 나도 같이 안고 있었다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어떤 관계는 그렇게 침묵 뒤에 찾아오는 말 한마디로 다시 시작되기도 한다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먼저 말을 건네본다. 침묵의 끝에서, 조심스레 손을 뻗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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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이 글이 누군가의 오래된 침묵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기를 바라면서.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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