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가끔 사랑보다 오래 남는다
어느 날 문득,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하루를 보내게 된 날이 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을 잊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모든 사물과 날씨와 온도가 당신을 닮아 있었고,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추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잊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기억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삶의 한 귀퉁이에 조용히 앉히는 일. 마치 오래된 사진첩처럼, 자주 펼쳐보진 않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그런 것처럼.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은 모두 다 기억에 남았다. 기쁘게 웃던 순간보다,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던 시간이 더 길게 남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미안해'라는 한마디가 더 자주 떠오른다. 아마도 사랑이란, 함께한 날보다 이별을 준비하던 시간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과 나누지 못한 대화가 이토록 많은 문장을 낳고, 이 문장들이 또 다른 나날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그 인사 이후로 당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감히 묻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무탈하기를, 마음을 놓을 자리를 찾았기를. 그리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의 이름이 당신의 마음속에 스치기를.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아니 충분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이며 지나는 날들이 많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듯하다. 잊고 싶을수록 자주 떠오르고, 덤덤해질수록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안다. 기억은 가끔 사랑보다 오래 남는다는 걸. 그리고 그 기억은 당신이 준 가장 조용한 선물이었다는 것도.
당신에게 쓰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이 마음이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써 내려간다. 말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을 대신해, 기억을 단단히 붙잡은 문장 하나로.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되뇐다. 당신이라는 이름을, 내 안에서 가장 따뜻했던 계절처럼.
그리고 또 한 번 생각한다. 그 시절의 당신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말없이 웃으며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나의 추억을 지나치는 바람처럼. 나는 그 바람에 잠시 눈을 감고, 당신의 이름을 속삭인다. 들리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알고 있다. 바람은 한 번쯤 그 이름을 품고 지나가리라는 걸.
어떤 밤은 너무 조용해서, 당신과 나눈 마지막 인사가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어색한 미소, 끝내 마주치지 못한 눈동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 순간.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천천히 걸었더라면, 조금만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지금의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까. 그러나 후회는 이제 그만이다. 그것조차도 당신이 남긴 흔적이니까.
끝내 닿지 못한 마음도, 흐르지 못한 말도, 모두 사랑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고, 그 시절의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향해 문장을 건넨다. 비록 도착지는 모르지만, 이 마음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