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by 마르치아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난 이 말에 반대론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내 안의 자아가 인정하는 소리보다 외부의 남들의 칭찬이 우리를 살게 해주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삶이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남의 칭찬이나 격려가 아니라, 진정 내가 나에게 해 주는 인정이다. 우리가 삶의 좌표를 잃어버릴 때는 이 인정과 칭찬이 끊어질 무렵이다.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 "네가 최고야"라는 맹목적인 칭찬을 해 주는 사람보다는 내가 가는 방향을 좀 더 넓혀주는 사람, 내 결을 인정하면서도 좀 더 다채로운 다른 결들을 조언해 주는 사람, 나는 언제부터 그런 인연을 곁에 두기 시작했다. 맹목적인 찬사에 눈이 먼 사람들은 그만큼 내부의 자아가 흔들리고 약하다는 방증일 뿐이다. 햇볕이 어느 식물에게 24시간을 비춘다고 가정할 때, 그 식물은 타 죽고 만다. 24시간 계속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면, 식물은 물에 녹아 없어지고 만다. 우리의 자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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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한 뼘은 고독할 시간을 한 뼘은 외로울 공간을 주어 그가 스스로 서늘한 그늘 아래서 남의 칭찬이나 격려가 아닌 맨 몸뚱이로 자신을 바라볼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멈춤이, 나는 상대를 진정 사랑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칭찬에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꼭 넣어서 말이 에너지가 되게, 그 사람의 표면에서 내 칭찬이 비늘처럼 우수수 떨어지지 않게 하는 습관이 있다. 사람들이 기운이 필요하고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기억나는 칭찬은 맹목적인 “최고에요”가 아니라, 이런 구체적인 칭찬으로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엎어지고 힘든 시간에 “아냐,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말보다는 “당신의 그 씩씩한 삶에 대한 태도가 참 인상 깊었어요”라는 한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새겨진다.


사람이 진짜 필요할 때 떠오르는 말은 자주 듣던 말이 아니라, 오래 남은 말이다. 말이 남는다는 건, 그 말이 나의 구체적 경험에 붙어서 살아 있는 생명처럼 내 안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칭찬도 사랑도 너무 많은 말로 주고받기보다, 한 문장 안에 온기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당신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당신은 빛이었어요”라는 말보다 “그때 당신이 아무 말 없이 의자를 한 번 당겨준 그 장면, 아직도 기억나요”라는 말이 더 오래 불을 밝혀주는 법이다.


말은 기억된다. 그 기억이 어떤 사람의 삶을 다시 일으킨다. 그래서 말은 칼보다 날카롭다는 옛 격언은 반쯤만 맞다. 말은 때로 흙손보다 부드럽고, 한 사람의 마음속 씨앗을 다시 싹틔우는 따뜻한 비이기도 하다. 장자는 말한다. “지나치게 귀한 것은 그 쓰임을 잃는다.” 칭찬 또한 그러하다. 지나친 칭찬은 그것이 향하던 의미를 휘발시킨다. 그리고 그 사람의 고유한 움직임, 본래 가지고 있던 리듬과 무게를 외부의 박수 소리에 맞춰 흔들리게 만든다.


장자는 ‘지인은 자기를 잊는다’고 했고, ‘신인은 남을 잊는다’고 했다. 그 말은 칭찬과 비난, 비교와 경쟁 같은 외부의 언어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때로 나는 그 경지에 닿고 싶어졌다가도 금세 누군가의 눈길 하나에 무너지는 나를 본다. 말로 지어진 자아는 쉽게 무너진다. 침묵으로 길러낸 자아는 조용히 오래 간직된다. 장자는 우리에게 계속 묻는 듯하다. “너는 지금, 누구의 언어로 살고 있나?” 그 물음은 아직 내 안에서 계속 맴돈다. 정답은 없고, 나는 그 물음 앞에서 오늘도 가만히 서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칭찬이 아니라 상대를 말 없이 바라봐 주는 시선이나, 뒤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 에너지가 1회용 같은 칭찬보다 훨씬 오래 새겨진다는 것을. 그런 시선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거기에 머물 뿐이다.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말보다 먼저 알아보는 눈, 그저 바라봐 주는 눈, 그 눈빛 하나가 마음속을 서늘하게 적신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에 품고 어떤 응원도 어떤 위로도 말로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손을 모으는 일. 그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남는 말이 아닐까 싶다. 말로 새기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오래, 더 깊게 새겨지는.


그래서 나는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게, 한 번뿐인 것 같지 않고, 오래도록, 은은하게, 그 곁을 지키는 사랑법을 택하기로 한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외부의 찬사나 칭찬이 결코 아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벌거벗은 정직한 나라는 존재, 그 존재의 흐름을 좇은 것이 내 인생의 여정이다. 남의 칭찬은 들으면 들을수록 목이 마르지만, 내가 나에게 하는 인정과 격려는 하면 할수록 샘처럼 솟아난다.


잘되면 덕을 본인에게 돌리고, 안되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그들은 성공이라는 단어가 스스로를 입증해줄 거라고 믿지만, 정작 그 성공이 무너지면 자신이라는 존재도 함께 무너지는 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런 찬사와 탓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비껴놓기로 했다. 누구 덕분도 아니고, 누구 탓도 아닌, 오직 내 발로 걷는 인생. 그 흐름 안에 머무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남들은 그런 삶이 고달프고 외롭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삶이 얼마나 값지고 충만한지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는 내가 풀어야 할 의무가 없다.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이 고요를 지키는 일이 말로 증명하는 일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롭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내 삶의 온기를 억지로 전달하지 않아도 된다. 고달프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이 고독이 얼마나 나를 살게 하는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박수와 찬사는 때로는 약이 되고, 때로는 한 사람을 서서히 갉아먹는 좀벌레가 된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박수와 찬사에 내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남들의 칭찬에 내 삶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좀 더 깊고, 좀 더 단단하게 나를 묶어야 한다. 세상이 박수칠 때 웃고, 세상이 외면할 때 주저앉는 사람은 결국, 세상이 기침하면 흔들리는 풀잎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이제 풀잎보다는 뿌리를 선택하고 싶다. 겉으로는 흔들릴지라도 속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그런 존재로,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를 향해 박수를 보낸다—들리지 않지만 가장 깊이 울리는 그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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