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무더기를 보면서
어제 수도원 뒷길 오르막을 걷던 중 스쳐 지나간 한 장면이 있다. 무심코 밟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장면이었지만 나는 그 앞에서 멈춰섰고 그 풍경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무언가를 던졌으며 그 잔상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모과 나무 아래 문드러져 가는 노란 모과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있었다. 그 썩어가는 모과의 잔상은 낯선 충격처럼 나를 붙잡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낙과였지만 그것이 내게 준 감정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고 문득 이 모든 것이 기록되어야 할 무언가임을 직감했다. 모과의 살이 문드러지며 퍼져나가던 그 향기. 그 향은 죽어가는 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이만이 낼 수 있는 향기였다. 나는 묻기 시작했다. 모과는 무엇을 위해 자신을 썩히는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떨어져버린 그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조차 자기 역할로 받아들이는 순명의 시간인가.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신념도 무력해지고 가야 할 길은 점점 어두워지며 그 길이 과연 나에게 의미 있는 여정인지 의심할 때가 있다. 유혹은 달콤하고 현실은 날카로우며 나는 종종 쉬운 길을 바라보며 왜 나는 이토록 가시덤불을 선택했는가 되묻곤 했다. 때로는 조롱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고 누군가의 충고라는 이름 아래 내 믿음은 조각나 흔들리기도 했다. 나의 연약함은 여실히 드러났고 나는 자주 움찔하며 뒷걸음쳤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질문을 껴안은 채 모과를 바라보았다. 그저 그 자리에 스스로를 내어주며 썩어가되 그 썩음 속에서조차 향을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 향은 결코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람을 따라 조용히 퍼지며 햇살 아래 자신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생명다운 생명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듯 그 모과는 스스로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말없이 숨도 쉬지 못한 채 빛에 반사되어 윤기마저 감돌던 그 문드러진 살. 그것은 마치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그분의 등 뒤에서 피가 스며든 옷자락처럼 느껴졌다.
살과 뼈가 채찍에 맞아 갈라지듯 모과는 스스로의 육체를 벌려 그 안에서 가장 깊은 사랑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 희생은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선택이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며 고통조차도 생명의 일부로 끌어안는 태도였다.
성심원은 한센인들의 보금자리였다. 낡은 시간의 그림자처럼 존재 자체로 세상의 외면을 받아야 했던 이들. 그러나 그들 역시 모과처럼 자신을 내어주며 살아왔다. 세상이 외면한 살결 위로 그들은 침묵으로 향기를 내었다. 문드러진 상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을 보여주는 다른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얼굴을 돌렸고 누군가는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정작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조용히 사랑을 선택해 살아낸 이들이었다.
나는 성심원의 작은 방들 사이를 걷다 한 켠에 놓인 오래된 휠체어를 보았다. 그 위에 놓인 담요는 햇볕을 머금은 듯 따뜻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 작은 창틀 위에는 누군가 갓 따온 듯한 모과 한 알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모과 앞에서 다시 숨을 고른다. 누군가에겐 악취일 수도 있는 그 향이, 나에겐 생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존재 자체로 상처를 지닌 이들이 뿜어내는 고요한 향기, 그것은 사회가 정의하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아파도 살아낸다는 것, 문드러진 살결로도 타인을 향해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싶었다. 어쩌면 모과는, 그 썩어가는 한 알의 모과는 수도원 담장 너머로 퍼지는 복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살아낸 이의 향기,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모과에게 가혹한 시련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향기라는 선물로 바꾸는 연금술이었다. 문드러지기까지의 그 시간 동안 모과는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비워내며 마침내 가장 진한 향을 완성시킨다. 나는 그 시간을 보며 인간의 노년, 혹은 한 생의 마지막까지의 여정을 떠올린다. 성심원의 노인들, 그분들의 시간 또한 모과처럼 긴 침묵과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살아온 시간의 결이 깊어 남긴 향기다.
나는 그 향기를 오늘 내 시간 속에 새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누구의 이목에도 닿지 않을지라도 그 향기는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지금 모과가 그러하듯이. 내게 손을 건넨 성심원의 한 어르신의 손은 마치 마른 나무껍질 같았지만, 그 손끝에서 나는 온기를 느꼈다. 모과의 껍질이 거칠고 단단할지언정, 그 안에 품은 것은 온전한 내어줌이었다. 그 손길 역시 삶을 다 내어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연민의 손길이었다.
나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인 나는 저 모과처럼 살고 있는가. 나의 썩음은 무엇을 향해 있는가. 나는 무엇을 내어놓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자연은 이렇듯 아무 말 없이 삶을 순환한다. 모든 죽음은 새 생명의 터전이 되고 모든 썩음은 생명의 이랑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자신의 고통에 불만을 품으며 자신이 버린 향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스스로를 감춘다. 나는 그 질문 속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내 삶이 언젠가 모과처럼 향기로 남을 수 있을까.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작은 온기 하나라도 될 수 있을까. 내 희생이 내 상처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의 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도 결국엔 하루하루 조금씩 썩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소멸만은 아님을 믿는다. 우리가 내어놓는 사랑과 희생은 누군가의 마음에서 씨앗이 되고 향기가 되어 그 사람의 시간 속에 퍼져간다. 모과가 땅 위에서 조용히 자신을 다 내어놓으며 다른 생명을 품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다시 묻는다. 나는 어떤 향기로 남고 싶은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향기를 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