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을 읽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안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를 처음으로 곰곰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 베이컨은 인간이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를 네 가지의 ‘우상’—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거울을 일그러뜨리는 손자국 같았다. 나는 그 네 개의 우상을 하나씩 꺼내어, 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적어두려 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글이기보다는 진실을 조금 더 맑게 바라보기 위한 나 스스로의 고백이자 기록이다
나는 인간이다. 그 말 안에는 이미, 진실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는 전제가 담겨 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믿고 싶은 방향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종족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가끔, 한 사람의 말 한 마디에 너무 쉽게 상처받곤 했다. 누군가의 표정, 차가운 한숨, 무심한 말투—그것들을 사실이 아니라 감정으로 해석하며, 혼자 오해하고, 혼자 속상해하고, 때로는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리기도 했다. 그 모든 반응은 내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그 순간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반응들은 대부분 내 안의 불안,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족 특유의 방어 본능에서 비롯된 해석이었다. 나는 진실보다 해석을 믿었고, 현실보다 감정에 가까이 있었다. 내가 본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흉내 낸 내 감정의 반사였다.
나는 나만의 동굴을 가지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동굴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졌고, 지금껏 나를 비추는 모든 빛을 특정한 색으로 굴절시키며 세상을 해석하게 했다. 내 동굴은 외할아버지의 따스한 품에서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젖보다 먼저 받은 손길,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에서 비롯된 허기, 그것들이 내 감정의 뿌리가 되었고, 내 안의 동굴은 사랑을 의심하며 기대하는 방식으로 자라났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늘 ‘언젠가는 떠나겠지’라는 예감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내 곁을 따뜻하게 지날 때조차 그 따뜻함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언제 식을지, 언제 변할지, 먼저 고민하며 그 사랑의 온도를 낮추곤 했다. 그건 현실이 아니라, 내 동굴의 그림자였다. 내 동굴 안의 빛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나는 그 조심성으로 타인을 해석했다. 이제는 안다. 내가 본 많은 세상의 단면은, 사실 내 기억의 톤이었음을. 나는 내 삶을 통해 타인을 해석했고, 타인의 말에 내 과거의 감정을 투사했다.
광장은 늘 시끄럽다. 사람들은 같은 단어를 말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뜻으로 듣는다. 진심이 말끝에서 미끄러지고, 한 문장의 해석이 열 갈래로 흩어지는 그곳에서 나는 종종 오해와 상처의 중심에 서 있곤 했다. 나는 언어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말에 온기를 담으려 애썼고, 상대의 말에서 진심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광장은 그 따뜻한 의도를 쉽게 비튼다. 내가 “괜찮아”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정말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대로 믿었고, 나는 이해받지 못했다는 실망 속에서 더 멀어졌다. 반대로,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 줄에 나는 너무 깊이 상처받았고, 그가 가진 진짜 의도는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의 껍데기에 갇혀 버리기도 했다. 나는 언어를 사랑하지만, 그 언어가 가장 큰 왜곡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걸 살아오며 수없이 체험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말 한 마디의 무게는 무겁고 날카롭다. 익숙함 속에 예의를 잃었을 때, 그 말은 칼이 되었다. 광장은 말이 오가는 곳이지만, 진심이 오가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말보다 눈빛과 침묵의 언어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랜 시간, 사회가 짜놓은 대본을 따라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왔다. “ “가톨릭 신자는, 여자는, 리더는…” 그 수많은 역할들이 내 삶의 무대를 지배했고, 나는 그 대사를 너무 잘 외워 내가 어디까지 나였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었다. 교회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늘 '맞아야 하는' 무엇이 존재했다. 권위는 늘 나보다 높은 곳에 있었고, 그 권위는 의심을 허락하지 않는 말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감히 질문할 수 없었고, 묻는 순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으며, 순응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 무대는 아름다웠지만, 나는 늘 관객석에만 앉아 있었고, 무대에 오르기 위해선 내 진심을 감추고 정해진 대사를 외워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무대에서 내려오는 연습을 시작했다. 진짜 하느님은 무대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내가 조용히 주워 든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작고 낮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믿었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나는 내가 만든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었고, 내가 만든 우상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을 쉽게 오해하고, 어릴 적 그림자에 기대어 반응하고, 말의 껍질에 휘둘리고, 권위 앞에서 조용히 숨죽였던 나—그 모든 모습이 내 안의 네 가지 우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이 우상들은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 동행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나는 다시 실수할 것이다. 또 누군가를 오해할 것이고, 또 상처받을 것이며, 또 말을 잘못 고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왜곡되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선을 내가 가지게 되었다는 것. 이제 나는 더 천천히 보고, 더 조심히 듣고, 더 맑게 말하며 살고 싶다. 내가 마주한 이 우상들을 때때로 손으로 어루만지며,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진실 가까이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