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마음이 맺히다

by 마르치아


우연히 만난 지인과 동네를 산책했다, 익숙한 길인데도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골목도 바람도 다르게 느껴진다, 마침 날이 을시년해서 우리는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나눴다, 별 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시간이 참 길게 남는다.


카페 앞 귤나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며칠 전만 해도 하얗게 피어 있었던 귤꽃이 거짓말처럼 다 져 있었다, 꽃이 진 자리에 어느새 동그란 열매가 작게,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런 풍경 앞에서 늘 마음이 조용해진다, 식물을 이해하면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꽃이 져야 비로소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어떤 감정도 사라져야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때는 화려한 감정이 좋았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온 에너지를 다해 말하고, 그 뜨거움이 내 진심이라고 믿었던 시간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감정이란 건 때론 스스로 사라져줘야 그제야 진짜 무언가가 남는다는 걸, 꽃이 스스로를 지우고 난 자리엔 열매가 온다, 그게 자연이고, 삶이고, 마음이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귤꽃이 다 져버린 나무를 보며 나는 오히려 더 경외감을 느꼈다, 자신의 화려함을 스스로 거두는 나무, 열매 하나 맺기 위해 빛나는 꽃잎을 조용히 떨구는 나무, 그 단단한 내면, 그 침묵의 용기 앞에 나는 말을 아끼게 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무언가가 스러지는 장면 앞에서도 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꽃이 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건 어쩌면 처음으로 마음이 맺히는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열매를 위한 계절은 조용하고도 묵직하게, 내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내 안에도 이제는 꽃보다 열매를 향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보다는, 그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책임과 온기가 남는지 지켜보고 싶어진다, 더 이상 나는 모든 순간에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조용히 곁에 머물며, 천천히 여물어가는 감정을 지켜보고 싶은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의 관계도, 마음의 계절도 결국 같은 것 같다, 꽃이 피는 순간은 눈부시지만, 꽃이 진 다음에도 그 나무는 살아 있고, 오히려 그 후에야 진짜 무게 있는 것이 맺히는 것처럼, 어떤 이별이나 침묵도 관계의 끝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결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 귤꽃이 지고 난 뒤의 나무 앞에서, 언젠가 내 안에도 그렇게 조용히 맺히는 열매 하나가 있기를 바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 누군가가 굳이 묻지 않아도 내 안에 조용히 익어가는 마음 하나, 그게 지금 내가 바라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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