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모와 엄마는 아침에 블랙커피 한 잔으로 식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미제를 파는 아줌마가 방문으로 집에 오시는 날에 항상 초이스 커피를 두 병씩 사 두셨다. 물론 미제 아줌마가 오시는 날에 내 치즈와 막대사탕과 밀크 캬라멜, 바둑 껌과 과자, 그리고 탈지분유와 엄마의 코티분, 내 베이비 파우더와 비타민, 이모의 노란 캡슐에 들어있어 초록색인 립스틱, 바르면 붉은 색이 나는 립스틱은 항상 구입했다.
미제 아줌마가 오면 새 커피를 타주는 게 일상이었다. 새 커피를 마시는 세 여자와 새 과자 캔을 열어 과자를 먹는 오후의 그 한가함은 우리들만의 티타임이었다. 이모는 초이스 커피만 고집했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아침으로 블랙 커피를 드신다. 물론 이모들도 두 분 다 초이스 커피만 아침으로 타 드셨고, 엄마는 내 식사 때문에 굳이 커피만 고집하지는 않으셨다. 이모 세 분 모두 애연가에 초이스 커피 중독자들이었다.
큰이모와 작은 이모가 우리 집에 오시는 날에는 이모방에서만 흡연이 허락되어서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세 여인이 작당이라도 하듯 지난날을 이야기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는데, 프랑스의 살롱을 방불케 정치와 문화 그리고 역사와 예술 이야기가 오갔다. 문이 잠시 열리는 그 틈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희미하고 매캐한 담배연기, 엄마는 이모들을 방에서 나오라고 하는 잔소리가 뒤엉켜 나는 이 순간이 명화의 어떤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박제되어 있다.
이모들의 이야기를 벽에 붙어 듣고 있으면 참 재미있었다. 이모들의 첫사랑 이야기, 그리고 각자 다른 종교 이야기, 이모 병원에 왔던 연예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엄마는 날 그 벽에서 떼어 놓으셨다. 키득키득 웃다가 어떨 땐 매운 눈물도 찔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엄마는 걱정과 연민 그리고 내가 너무 어리니 어른들의 이야기는 몰라도 된다시며 나를 멀치감치 떼어 놓으면 나는 어느샌가 또 그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와 모르는 단어들, 그렇지만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담배 냄새를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이모방에 내가 읽을 책에 담배 냄새가 배이는 게 너무도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모들을 이해했다. 그렇게 셋이 모여 쏟아내는 인생 이야기판이 없다면 어쨌을까.
외할아버지는 식사 때에 반주를 한 잔씩 드셨는데, 병아리 눈물만큼 남겨서 나에게 주시다가, 나는 어느새 술맛을 알게 되었다. 나만 할아버지와 앉아 겸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대작을 하는 것도 말릴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세 살 때 한글을 떼었으니 이제 주도도 가르치셔야 한다고 했다. 이모와 엄마는 황당한 얼굴이었지만, 할아버지와 밥상에서 세상을, 우주를, 그리고 순리를 배우는 그 인생학교의 수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병아리 오줌만큼 남겨주신 술로 목을 적시면서 눈을 깜박이고 할아버지의 그 따뜻한 웃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꿀맛처럼 달콤했다.
이모들이 언니오빠들을 데리고 올 때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와 겸상을 그렇게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와의 겸상은 오로지 나만의 권리였다. 이모들은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서운했다고 한다.
이모들이 할아버지에게 그 연유를 물으면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 경화는 내 이야기를 다 알아 듣는다. 그러니 나와 겸상을 할 자격이 있고." "아버지, 그럼 우리 현모는 없어요?" 하고 한숨을 내쉬면, 할아버지는 에헴 하시면서 "현모는 우리 대화에 낄 수 없다니까." 그러면서 나를 편애하셨다.
손주도 증손주도 낄 수 없었던 할아버지와 나와의 그 공간. 이모는 어떤 날은 울면서 "아버지 정말 너무 하세요. 경화가 흘린 건 방바닥에 떨어진 것까지 다 주워서 드시면서 우리 애들이 코 흘린다고 비위가 약하시다고 식사를 하지 않는다뇨." 그렇게 자주 이모의 원망이 들렸지만, 할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철옹성이었다.
할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유일한 손녀사랑은 이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이모와 오빠들에게는 여태 들어온, 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래서 사는 동안 질투도, 원망도 참 많이 받았다. 특히나 사촌들에게 말이다. "우리가 가도 할아버지는 경화한테 눈도 안 떼고, 우리가 가든지 오든지 할아버지 눈에는 오직 경화밖에."
그때의 밥상, 그 커피 냄새, 그 웃음과 울음이 섞인 이야기들. 그 안에서 나는 자랐고, 지금도 가끔 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