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인연을 걷어낸 자리에서 나는 나를 더 단단히 마주한다."
현명한 사람은 관계를 정리할 때 굳이 차단이란 방법을 쓰지 않는다. 감정을 드러내지도 어떤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저 몸을 멀리하고 마음을 거두고 침묵으로 답한다. 말없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에서 조용히 그 사람을 조용히 지워낸다.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싸우려 들지도 않는다. 애초에 그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그 사람을 더 이상 내 안에 들일 이유가 없기에 그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나는 안다. 누군가를 밀어내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은 자신의 품격을 낮추는 일이라는 것을. 감정에 흔들리는 대신 기준으로 관계를 거른다. 기분에 따라 상대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선을 넘어선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를 깊게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관계를 정리할 때 조용히 사라지는 이유는 더는 관계를 유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살며 내 삶이 어제보다 좀 더 단단해지는 이유는 사람을 덜 만나서가 아니라 사람을 잘 만나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양이 많다고 좋은 것이 절대 아니다. 불필요한 인연을 비우면 삶의 밀도가 그만큼 더 진해진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다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각자 마음은 값싼 인연에 흘리기엔 너무 깊고 귀한 것이다.
관계를 정리한다는 건 때로는 마치 계절을 보내는 일과도 같다. 아무리 아름다웠던 봄이라도 아무리 뜨거웠던 여름이라도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한다. 익숙했던 이름을 마음에서 지우고 매일같이 들었던 말투를 서서히 내 일상에서 벗겨낸다.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고 억지로 붙들지도 않는다. 그저 흐르게 둔다. 흘러가게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이름을 떠올려도 더 이상 바람이 일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계절을 다른 쪽으로 향하게 한다.
누군가는 차단을 선택하며 확실한 선을 긋는다.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정보다는 내 삶의 구조 안에서 그 사람을 천천히 지워간다. 보이지 않는 지우개로 아무 말 없이 아무 소리 없이. 그러면서도 상대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오래 참고 있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말하지 않고 지켜봤는지를. 관계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나는 이제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감정을 흘리든 그것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보다 내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은지가 더 중요하다. 결국 관계란 내가 마음의 문을 열기로 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문을 닫았다는 건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나의 세계와 더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관계의 끝은 반드시 갈등이나 다툼일 필요는 없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나는 나의 삶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어떤 인연에는 문을 닫고 어떤 인연에는 차 한 잔을 내어준다.
가끔은 혼자서도 충분히 좋은 날들이 있다. 굳이 누군가와 나누지 않아도 충만한 날, 그것이 성숙이라는 것을 나는 점점 더 깨닫는다. 관계는 숫자가 아니라 밀도다. 깊은 관계 하나가 열 개의 얄팍한 인연보다 내 삶을 훨씬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내 마음은 가볍지 않다. 아무에게나 허락될 수 없고 쉽게 떠넘겨질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고른다. 나와 함께할 사람, 나의 고요를 이해하는 사람, 말없이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조용히 다듬어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누구에게 어떤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내 기준 안에서 고요히 걸어가는 삶. 관계는 필연적으로 정리되는 법이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가 정리되면서 비로소 내 삶이 정돈된다. 불필요한 기대, 오해, 희망, 실망… 그 모든 감정의 잔재가 사라지고 나면 드디어 내가 보인다. 드디어 나다운 하루가 찾아온다. 사람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것이고, 다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진심을 향한 길을 고르는 것이다. 모든 인연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조금 더 슬프게 만들거나, 아니면 아무 영향 없이 흘러가게 만든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더 명확해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결국, 가장 나다운 고요가 찾아온다. 고요는 때로 웃음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으니까. 나는 그 안에서 말없이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