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란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살아왔다".
왜냐하면 나는 나라는 운율에 나를 맡기고 사는 것이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여섯 달밖에 안 된 아기였다. 어느 날 내가 움직임이 줄어들고 새까만 눈으로 천장을 삼십 분 넘게 응시하고 있을 때 온 가족은 내가 이상하다고, 심지어는 공포까지 몰려왔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멀쩡하던 아버지가 쓰러졌고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였지만 내 몸 어딘가에서는 이미 이별의 신호가 조용히 진동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삶이란 우연이나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세상은 늘 신비와 심볼로 나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나는 굳이 그 신비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그 모든 신호들을 알 것만 같았다. 삶의 모든 중요한 장면마다 뜻밖의 상징과 작은 신비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 안에선 설명되지 않는 낯섦보다 묘한 친밀감이 먼저 피어올랐다. 별빛이 내 방 창을 스치던 밤도, 우연히 지나친 길모퉁이에서 오래전 꿈에서 본 풍경을 만난 그날도, 나는 그냥 그 모든 것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세상은 분명히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나는 그 신호를 읽는 일에 서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영혼의 어디에선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언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누구나 이유와 해명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나는 이미 내 마음속에 스며든 신비와 심볼라를 받아들이며 그 자체로 살아왔다.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때로는 오래된 나무처럼,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이해하려 애쓸수록 멀어지는 신비의 결,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 삶에서 가장 오래된 리듬이었고 내가 나를 믿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수백 초 단위로 일어나는 삶의 신비를 이해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내게는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상징과 신호들. 별이 흐르는 밤마다, 바람이 흔드는 창틈마다, 낯선 목소리와 눈빛들,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는 그 모든 신비를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설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흐릿해지는 것들. 나는 그저 매 순간마다 내 안에 스며드는 그 신호들을 한 번도 낯설어하지 않았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았고, 그냥 그 신비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자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내가 그 신비를 놓쳐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채 살아간다면 오히려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내 안에는 늘 아주 미세한 파동이 살아 있었고 나는 그 미묘한 운율과 함께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세상과 조용히 대화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그 신비를 기억하면서 삶을 살아가진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실망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신호와 상징, 삶의 작은 기적들이 때로는 남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허공의 먼지일 뿐이었다. 세상이 점점 더 논리와 증거와 합리의 언어로만 가득 차고 신비와 상징은 쓸데없다는 말 뒤로 밀려날 때 나는 자꾸만 마음이 작아졌다. 내가 받아들이고 누려왔던 이 신비의 결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왜 사람들은 그토록 삶의 신비를 외면하고 스스로를 건조하게 만드는 걸까. 내 안에서는 매 순간마다 작은 기적들이 피어나는데 정작 세상은 그 기적의 꽃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때로 외로웠다. 나만 다른 리듬으로 춤추고 있는 듯한 고립감, 그것은 슬프지만 내가 끝내 포기할 수 없는 내 삶의 운율이었다.
사람들은 신비를 원하면서도 막상 신비로운 일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면 오히려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만다. 누구나 기적을 꿈꾸고 기적 같은 변화를 바라지만 정작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 낯설고 설명되지 않는 것 앞에서 머뭇거리고 때로는 외면하거나 배척하기까지 한다. 나는 오래도록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신비가 오기 전까지는 입을 모아 이 삶이 너무 삭막하다고, 어떤 새로운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바람이 창을 흔들고 하늘의 별이 평소와 다른 경로를 그리면 설마라며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을 지켜온 논리와 일상의 벽 안으로 숨어버린다. 나는 그럴 때마다 세상에 길게 한숨을 쉬고 만다. 나는 신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신비 그 자체로 살아왔고 신비가 내 삶의 일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아니 아마 영원히, 신비와 마주하는 순간엔 두려움을 먼저 꺼내들고 가장 깊은 변화의 문턱 앞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이 맞는 영혼을 만나게 되면 정말 마음 한 가운데에서 환호가 터져 나올 만큼 기쁘다. 내가 아무리 오래 홀로 신비와 운율을 사랑해왔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리듬으로 숨 쉬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어린아이가 된 듯 마음이 뜨겁게 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듣는 상징, 설명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신비, 그 단순하고도 흔치 않은 만남에 나는 종종 눈물을 삼킨다.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내 운율과 결이 다른 누군가의 영혼에서 똑같이 울리는 것을 발견하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 환호성은 말이 아니라 두 영혼이 서로에게 보낸 오래된 신호. 내가 이 세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이유가 된다.
이것은 칼 융의 동시성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내 삶에 깃든 신비는 단순히 의미 있는 우연의 집합이 아니라, 말로 다 채울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떨림이었다. 내 안에서만 진동하는 그 운율은 이론의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다. 세상은 가끔 철학자들의 이름을 빌려 모든 비밀을 설명하려 들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설명이 닿지 않는 순간에야 비로소 더 깊은 신비가 드러났다. 어떤 경험은 그저 우연이나 상징의 나열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그 자체에서만 울려나오는 미세한 파장이고,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내 영혼에 새겨진, 너무나 고유한 리듬이었다. 내가 살아가며 만난 수많은 신비와 상징, 꿈결 같은 예감과 잦은 동요들, 그 모든 것이 결국 설명을 거부하는 한 편의 오래된 시였고, 이름 붙이지 못한 침묵 속에서 나만의 언어로만 해석되는 비밀스러운 노래였다. 나는 이제 안다. 모든 신비는 언젠가 반드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삶의 진짜 근원은 이론 바깥, 논리의 빈틈, 아무도 닿지 못한 가장 깊은 고요에 있다. 그곳에서 나는 나만의 운율을 듣고, 아무에게도 해명하지 않는 침묵으로, 나를 믿고 살아간다.
그 파동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면 우주는 나에게 어김없이 심볼라를 남겼다. 작은 불빛 하나, 갑자기 반복되어 들려오는 노래, 누군가의 말 한마디, 문득 꿈에 스며든 낯선 풍경, 그리고 이유 없이 가슴을 울리는 예감까지. 내가 내 본래의 운율에서 잠시 벗어나 방황할 때마다 세상은 다시 내게 상징을 보내왔다. 멀어지는 마음을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는 듯, 우주는 조용하고도 강하게 신비로운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나를 꾸짖는 것도, 설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나에게로, 내 깊은 운율과 신비로 다시 돌아오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작은 손짓, 낮고 느린 속삭임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나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또 한 번 존재의 중심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나라는 문장에 닿기 위해 신은 고독의 자리에 나를 자주 앉혀 놓으셨다. 홀로 남겨진 긴 저녁과 한밤의 적막, 아무도 내 안의 파동을 알아주지 못하는 순간들, 그 모든 외로움 속에서 나는 내 운율을 더욱 또렷하게 들었다. 고독의 깊은 바닥에 내려앉을수록 내 안의 소리는 더 투명해졌고, 세상이 지워진 그 한가운데에서만 나는 진짜 나라는 문장에 조용히 닿을 수 있었다. 우연이 반복될 때마다, 신비가 문 앞을 두드릴 때마다, 그 침묵의 시간은 내게 거대한 스승이었다. 나는 내 운율을 되찾았고, 세상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그 자리에야 비로소 내 영혼이 쓴 가장 본질적인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고독은 벌이 아니라, 신이 내게 건네준 오래된 초대장이었다. 오직 나만의 언어와, 나만의 운율로 살아가라는, 쉼 없이 이어지는 신의 속삭임이었다.
나는 자주 고독의 자리에 초대받는다. 낯설거나 무섭지 않은 그 자리에 나는 오히려 자주, 스스로 조용히 앉는다. 세상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오직 내 안의 숨결과 운율만이 선명해지는 그 순간, 나는 나를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한 자리를 만난다. 외로움은 내게 벌도 시련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내 영혼의 파동을 가장 명확히 듣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그곳에서만 나는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내 존재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잊지 않는다. 고독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오래된 안식처였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다시금 내 이름을, 내 운율을, 내 신비를 조용히 쓰곤 한다.
삶의 신비는 내 리듬을 찾아가라고 매 순간 나에게 상징으로 다가온다.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의 그림자, 우연히 반복되는 숫자, 오래된 꿈결에 남겨진 풍경, 익숙한 길목에 갑자기 피어난 한 송이 꽃까지, 모든 순간이 내게 나의 운율을 잊지 말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그 상징들을 하나하나 받아 적으며 다시 내 안의 고요한 파동을 찾는다. 신비는 언제나 나를 바깥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내면으로, 내가 나를 발견하는 자리로 이끈다. 그리고 나는 그 상징의 흐름을 따라 다시 한 번, 내 삶의 고유한 리듬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