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제물론을 사유하며
장자의 「제물론」을 사유하다
무릇 소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것은 소재가 지닌 고유한 소리일 뿐이다. 슬픈 음악을 들어도, 소리가 슬픈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장자의 『제물론』을 해석한 장타이옌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까… 소리는 슬프지 않은 걸까?”
우리는 소리를 감정으로 오인하며 산다. 빗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느끼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식히고, 음악 한 곡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 빗방울도, 그 바람도, 그 음표 하나하나도 본디 아무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위에 우리의 마음이 내려앉았을 뿐이다. 소리는 울지 않는다. 우는 건, 그 소리를 들은 나다.
이 깨달음은 글을 쓰는 내게 깊은 파장을 던졌다. 나는 얼마나 많은 문장에서 사물을 의인화했을까. 텅 빈 찻잔을 외로움이라 이름 짓고, 저물어가는 햇살을 쓸쓸함이라 말하곤 했다. 마치 그 사물들이 원래부터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장자의 말처럼, 모든 것은 다만 '그저 그러할 뿐(自然而然)'이었다. 내 글의 감정은, 결국 내 마음의 그림자였다는 걸, 나는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이 없는 것’에 감정을 입히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투사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사물의 표정을 묘사하면서도, 정작 그 사물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결을 잊는다. 글쓰기는 거울과 같다. 슬픔을 묘사할수록 나의 내면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나는 비에 대해 쓰지만, 실은 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바람 부는 날씨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창문이 슬픈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멈춰서 다시 썼다. “창문이 흔들렸고, 그 소리에 내가 슬퍼졌다.” 문장은 조금 길어졌지만, 더 정직해졌다. 세상의 슬픔을 대신하지 않고, 내 슬픔의 주인을 나로 돌려놓았다.
장자는 모든 사물의 본성이 평등하다고 보았다.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 옳고 그름조차 서로 바뀔 수 있으며, 다만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붙였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할 뿐이라고 했다. 그 사유는 나의 글쓰기에도 겸손을 가르쳤다.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단정하지 않기. 사물의 침묵을 너무 함부로 해석하지 않기. 침묵은 침묵일 뿐이며, 그 안에서 울리는 메아리는 내 마음이 빚은 파문이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조심하려고 한다. 슬픔을 사물에 투사하면서, 그것이 내 슬픔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나를 울게 하는 것은 비가 아니라, 내가 꾼 꿈이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방향이다.
소리는 아무 감정도 없다. 슬픔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그것을 알고 나니, 나는 사물을 조금 더 고요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말 없는 사물 앞에서, 말 많은 나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한 문장을 써내며 나는 묻는다. 이 문장은 슬픈가, 아니면 내가 슬픈가.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내 안에서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