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세가지 겹
업식·전식·현식을 따라 내면을 내려가며
우리는 늘 우리가 의식한 다음에 말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이유 없이 상처받고, 상대의 표정 하나에 불쑥 화를 내며 돌아서고, 어떤 장면 앞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이 터져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되묻는다. 도대체 지금 나를 움직인 건, 누구였을까.
불교 심리학에서는 세 겹의 의식 작용을 말한다. 첫째는 업식(業識), 둘째는 전식(轉識), 셋째는 현식(現識). 그 중 업식은 뿌리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감정의 침전물. 사랑받고 싶었지만 닿지 못했던 유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 쓰다 오히려 떠나보낸 관계, 혼자가 익숙해진 채로 계속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 이 모든 경험이 언어도 없이 업식으로 내 안에 고인다. 나는 그것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너무나 잘 안다. 어떻게 반응할지, 언제 움츠러들지, 누구를 피하고, 어떤 사랑을 두려워하는지.
업식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 누군가가 내 마음의 문고리를 살짝 건드릴 때, 잊고 살던 감정을 밀물처럼 밀어올린다.
그 감정은 전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생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해석이다. 그 사람이 내게 따뜻하게 말했을 뿐인데, 나는 “저건 진짜가 아니야”라고 단정짓고, 멀어질 준비를 한다. 그 사람은 변한 게 없다. 달라진 건 내 마음의 지형이고, 전식은 그 지형 위에 경계선을 긋는다. “여기부터는 위험하다.” “저 말은 믿지 마라.” “이 감정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전식은 논리로 무장하지만, 그 논리는 업식의 설계도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깥에서 설명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다정했고,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업식이 두려운 것은 다시 상처받는 일이 아니라, 다시 기대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식은 드러난 얼굴이다. 내가 멀어지는 이유, 내가 침묵하는 이유, 내가 끝내 그 사람을 밀어낸 이유. 말은 항상 현실 속에 남는다. 그러나 그 말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두 층—업식과 전식—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한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래서 관계는 엇갈린다. 말과 말 사이에서가 아니라, 말이 태어나기 전의 마음 안에서 이미. 내가 화를 냈을 때, 사실은 상처받았다고 말했어야 했다. 내가 돌아섰을 때, 사실은 붙잡아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식조차 못한 채, 상처도, 사랑도, 모두 숨긴 채 사라졌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정말 미워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내 안의 과거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거는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 마음의 지하실에서 오래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글을 쓸 때도 그렇다. 내가 쓰는 문장은, 지금의 나보다 오히려 내가 모르는 나를 드러낸다. 문장 속의 분노, 두려움, 갈망—그건 지금 당장의 의식이 아니라, 더 깊은 곳의 업식이 끌어올린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쓴 단어 하나가, 누군가의 업식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이 칼이 될 수도, 빛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 안의 마음을 이렇게 부른다. 업식은 기억하지 못한 나, 전식은 그 나를 해석하는 나, 현식은 그것을 드러내는 나. 그리고 진짜 나는, 그 모든 나를 들여다보려 애쓰는 조용한 관찰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