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남의 이유
우리는 삶의 에테르 위에서 조우한다
모든 인연은 만남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말을 나누기도 전에 상대의 온도를 느끼고, 이름을 알기도 전에 그 사람의 결을 알아보는 일. 나는 그걸 에테르 위의 조우라 부르고 싶다.
고대인들은 이 세상이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불, 물, 흙, 공기.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별이 떠 있는 천상의 세계는 그것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다섯 번째 원소, 에테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물질을 덧붙였다.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감싸지만 어디에도 닿지 않는 것.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에테르가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흐르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전해지는 것. 말이 닿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 공기의 떨림.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결을 어루만지는 방식. 우리는 그 위에서 조우한다. 삶이라는 무수한 인연의 장에서 어떤 이는 스쳐 지나가고, 어떤 이는 자리를 남긴다. 그 차이는 만남의 깊이가 아니라, 그 만남이 머문 시간 바깥의 기류에 있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 인사로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반면 어떤 이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도 기억에 한 줄도 남지 않는다. 그 차이를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것은 삶의 에테르 위에서의 진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리듬을 가지고 살아간다. 말의 속도, 마음의 템포, 고요의 밀도. 그런데 때때로, 누군가의 말과 나의 호흡이 같은 박자일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안다. 아, 이 사람은 내 안의 침묵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건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정의나 언어도 그 흐름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에테르는 늘 말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 그런 사람을 만났다. 이름보다 눈빛이 먼저 다가온 사람. 사연보다 숨결이 먼저 닿은 사람. 무슨 말을 하든, 그 말 너머의 의미를 먼저 알아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보통 한참 후에, 이별이 다녀간 자리에서 더 또렷해진다.
에테르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쳐간 인연도, 헤어진 마음도, 그 위에 남은 감각은 오래 머문다. 그래서 어떤 기억은 이유 없이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때 그 사람… 나도 그에게 그런 진동이었을까?’
사랑도, 우정도, 말로만은 다 설명되지 않는다. 진짜 마음은 그저 “좋아해”라는 말보다 침묵에 가까운 호흡으로, 함께 머무는 고요로 전해진다. 우리는 모두 에테르 위에 떠 있는 존재들이다. 보이지 않는 선율 속에서, 누군가와 어긋나고, 누군가와 맞닿는다. 그리고 가장 깊은 만남은, 말이 아니라 존재의 리듬이 겹쳐질 때 일어난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삶의 에테르 위에서 서로를 기다려온 인연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살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단 몇 사람만이 에테르의 흔들림으로 우리를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누군가에게 그런 한 줄의 공기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