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부르심을 따라
신은 우리를 부르기 위해 지으셨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삶은 곧 부르심에 대한 응당한 증거이며 증인이다. 그러므로 살아내는 것 자체가 곧 부르심에 대한 반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다른 인간의 부르심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하며 그 대답을 표현한다.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어떤 소명에 따른 만남이다. 누군가의 눈길과 말 한마디조차도 내 안에 반향을 일으켜 내 대답을 요구한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은 곧 영혼과 이성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갈망하는 확실하고 무거운 콜링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그 소리를 알 수 없다. 바다의 파도가 일렁일 때는 심해의 고요를 들을 수 없듯이 마음이 기울어져 있거나 욕망에 매몰되면 영혼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사라진다. 오직 잔잔한 물결이 이는 고요 속에서만 우리는 밑바닥에서 외치는 작은 부르심을 듣는다. 나는 왜 여기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 물음이야말로 부르심의 가장 맑은 울림이다.
물질 세계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매일을 거대한 욕망의 부르심에만 쫓기며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알지 못한다. 아예 귀를 닫고 눈이 먼 소경처럼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이 부르심을 부정하고 살아온 대답은 결국 허무라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삶이 끝나갈 때 남는 것은 채우지 못한 허기뿐이다.
우리는 늘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의 콜링을 받으며 산다. 기도 또한 그러한 응답이고 손길과 따뜻한 애정 또한 그러한 대답이다.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 주는 일이다. 그 작은 응답들이 쌓여 삶의 의미가 된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남과 다투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과 항구히 싸워야 한다. 그 모든 싸움조차도 나를 부르기 위한 신의 큰 계획이며 우주의 섭리임을 깨닫는 순간 삶의 무게는 감당할 만한 의미로 변한다.
나는 암 수술을 통해 삶의 채널을 완전히 바꾸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서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무엇을 위해 다시 살아야 하는가. 삼 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 던져진 쇳덩이처럼 삶에 대한 불타는 질문을 품고 살았다. 신에게도 묻고 지혜로운 이들을 찾아가 물었다. 길 위에서, 병상에서, 책 속에서, 나를 스쳐간 이들의 목소리에서 쉼 없이 물었다.
삼 년여를 묻고 나니 한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 그것이 앎이 아니라 삶일 것. 네 나머지 삶으로 그 대답을 증명하여라.”
그 한 문장이 지금의 나를 완성시켰다. 그때부터 나는 순간마다 귀를 기울이며 살아왔다. 내 삶의 모든 장면은 질문의 연속이었고 대답의 연속이었다. 인간으로서 내 역할은 무엇일까.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그것을 묻고 또 묻는 가운데 나는 나의 존재 이유를 조금씩 알아갔다.
어떤 날에는 부르심이 바람처럼 스쳐가기도 했다. 곶자왈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기울이는 것처럼, 내 영혼도 그 바람 앞에 조용히 기울었다. 어떤 날에는 타인의 고통이 부르심이 되었다. 내 앞에 나타난 약자의 눈물이 나를 불러 세웠고 나는 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날에는 침묵이 부르심이었다. 아무 소리 없는 침묵 속에서 더욱 크게 울리는 부르심을 듣기도 했다.
삶이란 결국 대답의 연속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 거부조차 대답이 된다. 그러나 언젠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우리는 묻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과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이었는가. 그때 허무가 아닌 감사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을 살아야 한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더세인트를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거창한 사업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인간으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나의 소명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찾다가 도달한 하나의 결론이었다. 누군가의 지친 삶에 쉼을 주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그것이 내 대답이었다.
더 세인트는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른 이의 것이다. 그분께서 부르셨기에 나는 이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더 세인트에서 위로를 받고 누군가는 여기서 다시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 모든 만남과 떠남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대답을 이어갈 것이다.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 그것이 앎이 아니라 삶일 것.”
그 문장을 나는 여전히 품고 살아간다. 내 대답이 미약하더라도 그분은 들으실 것이며, 나의 작은 대답이 누군가의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