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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무 이야기

by 마르치아

#나의나무이야기

할아버지는 인간이 어찌 생겨났는지를 늘 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성서 창세기에도 나오는 바로 생명나무였다. 할아버지는 세상이 어찌 생겨났고 시공간이 어찌 생겨났고 또 물질과 에너지가 어찌 만들어졌고 생명과 자연이 어찌 만들어졌고 인간이 어찌 만들어졌고 경화 너도 어찌 만들어졌는지를 알기 쉽게 나무 그림으로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그때는 그저 그림이 신기하고 예쁘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알려주는 도식이었다.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피어난 생명나무의 가지는 우주의 순환과 생명의 질서를 상징했고 그 뿌리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의 숨결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클림트의 생명나무를 보았을 때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그려서 애써 세상을 설명해 주시던 그 생명나무였다. 그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이 요동쳤다. 나의 기억 속 오래된 시간들이 되살아나고 마치 할아버지가 그 곁에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언제나 아비였고 우주였고 백과사전이었고 또 내면의 제3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혜 그 본질이었다.


제주 산야를 다니다 보면 홀로 서 있는 나무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 나무들이 어쩐지 외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의 리듬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리고 그 잎은 하늘의 숨을 받아 다시 땅으로 내려보낸다. 그 순환의 질서 안에 나는 늘 위로를 받는다. 할아버지는 물음이 생기면 꼭 자연에게나 별에게 물어보라 하셨다. 그 가르침 때문인지 나는 나무를 찾아 품에 덥썩 안기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나무의 속살에서 미묘한 진동이 느껴진다. 마치 오래전 할아버지의 손길이 내 어깨를 다독이는 듯하다.


그런데 내가 안고 있는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나무였다. 할아버지가 진을 빼가며 네다섯 살 손녀에게 남기고 떠나신 지혜의 나무였다. 그 나무는 내 안에서 자라며 나를 어른으로 키웠고 세상과 화해하게 했고 때로는 쓰러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나무는 단지 물상의 나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깊은 존중이었고 경외심이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이었다. 나무에게 물어보라 하신 말씀은 결국 인간이 잃어버린 참 나를 찾으라는 뜻이었다. 자연에게 묻는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묻는 것이며 하느님께 묻는 것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유독 마음이 기울어지는 나무가 있다. 나무의 존재가 바위처럼 강하고 크게 느껴질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다. 그 나무의 속살에는 수십 년의 바람과 비와 햇살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안에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된 지혜가 깃들어 있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에 들어서면 경외심이 일어난다. 종류가 다른 온갖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성지를 보는 듯하다. 서로 다르되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은 마치 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최고의 산물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나무도 짐승도 산도 바다도 인간과 수평의 위치에 존재한다. 인간과 자연은 공생의 관계이며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가 아니기에 한 포기의 풀도 인간과 동등하다. 나는 그러한 겸허한 생각으로 나머지 삶을 살려 한다.


할아버지가 그려주신 나무의 뿌리는 지금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린다. 그 물은 신앙의 뿌리이며 기억의 샘이고 삶의 근원이다. 나무의 가지는 관계를 상징한다. 가족과 친구와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마음의 길이며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이다.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잎사귀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고 그 잎마다 떨어지는 순간마다 또 다른 생명이 자라난다.


열매는 결국 인간이 살아온 흔적이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용서였고 회개였고 또 다른 시작이었다. 나무는 늘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며 세상을 잇는다. 나 또한 그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고 열매가 되고 싶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생명나무는 여전히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뿌리가 땅을 움켜쥐듯 나의 믿음도 흔들릴 때마다 다시 땅을 딛는다.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 이유는 그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나무를 마음에 심고 산다. 그 나무가 나이고 내가 그 나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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