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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거리

새들에게 우리는 삶을 배운다

by 마르치아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면 전깃줄 위에 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다. 그 간격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본능은 이미 생존의 수학을 알고 있다. 너무 가까우면 날개짓이 서로를 방해한다. 너무 멀면 포식자 앞에서 외따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들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택한다. 본능이 가르쳐 준 균형이다.

인간의 삶에도 이 거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 거리를 잃는다. 사랑을 핑계로 가까움을 강요하고 자유를 핑계로 거리를 벌린다. 가까움은 쉽게 소유가 되고 멂은 쉽게 단절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질식하거나 고립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중간의 거리에서만 관계는 오래 간다. 가까워서 상처되지 않고 멀어져도 잊히지 않는 자리.



성경은 늘 거리를 말한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 그곳은 거룩한 땅이었고 인간의 발걸음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자리였다. 신은 인간을 너무 가까이 끌어당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너무 멀리 밀어내지도 않으셨다. 가까움과 멂의 균형 속에서 신과 인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경외와 친밀은 바로 이 거리에서 동시에 가능하다.




기도 또한 거리의 사건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 하느님을 욕망의 도구로 만들면 기도는 주문이 된다. 너무 멀리 두어 하느님을 추상적 관념으로만 남기면 기도는 독백이 된다. 참된 기도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침범하지 않고도 가까이 있을 수 있고 잊히지 않고도 자유롭게 있을 수 있다. 그 자리가 기도의 자리고 신앙의 호흡이다.





교회 공동체도 이 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는 언제나 거리를 둘러싼 위기를 겪는다. 친밀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쉽게 폐쇄가 되고 냉담을 방치하는 공동체는 쉽게 무너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고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진실하려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서야 한다. 그때에만 타자는 타자로 남고 공동체는 공동체로 존속한다.

나는 전깃줄 위의 새들을 바라보며 곶자왈의 나무들을 떠올린다. 그 나무들 또한 뿌리와 줄기 사이에 거리를 둔다. 뿌리는 뿌리끼리 엉켜 있으면서도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다. 줄기는 줄기끼리 빛을 나누면서도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숲의 생명은 거리 위에 서 있다. 인간의 사회도 다르지 않다. 거리를 잃는 순간 파괴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룩한 거리의 표징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졌다. 그는 하늘에 속했으나 땅을 떠나지 않았고 땅에 속했으나 하늘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두 팔을 벌려 인간을 품되 소유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드러내되 강제하지 않았다. 십자가는 멂과 가까움이 동시에 성취된 자리였다. 그 안에서만 자유와 사랑은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돌아본다. 언제 나는 상대에게 너무 가까웠던가. 언제 나는 상대에게 너무 멀었던가. 가까움 속에서 나는 상대의 욕망을 나의 욕망처럼 떠안았고 결국 나를 잃었다. 멂 속에서 나는 상대의 온기를 거부했고 결국 고립 속에서 메말랐다. 그러나 간혹 찾아온 적당한 거리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상대도 자유로웠다.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도 존중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곧 거리의 윤리다.



거리의 윤리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조건이다. 존재는 고립과 혼합 사이에서 흔들린다. 고립은 소멸이고 혼합은 소멸이다. 그러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중간의 거리가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새들이 전깃줄 위에서 보여준 단순한 질서는 곧 존재론의 비밀을 드러낸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인간은 책임을 자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책임은 거리 위에서만 가능하다. 거리가 사라지면 타자는 대상이 되고 대상화된 타자는 더 이상 얼굴이 아니다. 인간이 타자의 얼굴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이 필요하다. 그것이 타자성의 윤리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자리를 찾는다. 벽에 등을 기댈 수 있는 자리. 사람들과 적당히 섞일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서 나는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를 회복한다. 그것은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다. 간격이 없으면 나는 쉽게 흡수되고 쉽게 소멸한다. 간격이 있을 때만 나는 나로 선다.



신앙도 이와 같다.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그 거리가 무너지면 인간은 하느님을 도구로 삼거나 하느님을 부재로 방치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서 계신다. 그분은 나를 삼키지 않고 나를 버리지도 않는다. 그분은 나와 함께 계시되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나는 그분 앞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책임을 자각한다. 그것이 신앙의 자리다.



나는 오늘도 전깃줄 위의 새들을 본다. 그 질서가 단순히 본능의 산물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곧 생명 전체가 지켜온 법칙이다. 하늘과 땅.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 모든 관계는 거리를 세워야만 산다. 거리가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조건임을 배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룩한 자리. 나는 그곳에서 나 자신을 지키고 타자를 존중하며 하느님을 경외한다. 새들은 본능으로 알고 인간은 신앙과 사유로 배운다. 나는 오늘도 그 자리를 찾는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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