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만 같아라"

깨를 볶으며...

by 마르치아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이만큼 나이가 드니 알 것만 같다. 한가위에 일어나는 마음은 온통 "감사"뿐이다. 살아 있는 것도 감사하고, 별탈 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도 감사하고, 온 만물이 자연이 그리고 신과 이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해 주는 것도 뜨거운 감사함이 밀려온다. 그렇다면 나를 힘들게 했던 시련과 고난도 마땅히 감사할 일이다. 실로 나답게 나로 살게 해주니 말이다. 이런 감사한 마음으로 올 명절 준비를 한다. 나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구색보다는 내 마음과 태도에 중점을 두는 삶을 지향한다. 돌이켜보니, 명절 5일 전부터 나의 명절은 늘 준비되는 것 같다.


나는 5일 전부터 집안 단도리를 해 둔다. 집에 묵은 먼지를 떨어내고 환기를 더 신경 써서 시키고 이불을 빨래해 둔다. 그 집안 단도리부터 내 명절 준비가 시작된다. 그리고 양념을 점검하는 것이 명절 음식 준비의 첫 단계다. 깨를 새로 볶아두고, 또 얼마간은 빻아놓고 기름을 새로 사다 놓는 일부터가 나의 명절 음식 준비의 시작 단계다. 오늘은 깨를 볶고 기름을 사 두었다. 그리고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을 추렴해서 빻아둔다. 그리고 파를 씻고 다듬어서 쓰기 좋게 해 둔다.


양념이 혹은 부족한 게 없는지, 음식하다가 당황하지는 않을지 미리 꼭 체크해야 실수가 적다. 그리고 4일 전부터는 간단하게 김치를 담가둔다. 명절 음식은 기름지기가 일쑤인데, 개운한 김치와 곁들이면 명절도 속이 부대끼지 않는다. 4일 전에 담근 김치가 명절에 먹었을 때 가장 맛이 좋다.


3일 전에는 밑반찬을 해 둔다. 북어포 고추장 무침이나 우엉 조림, 코다리를 양념해 미리 재워둔다. 이때 만든 밑반찬이 명절 음식보다 사실 인기가 더 좋다. 명절 음식은 달고 기름지다. 의외로 담백하고 칼칼한 밑반찬이 있어야 조화롭다.


이틀 전에는 재료를 모두 씻어 일하기 좋게 분류해 둔다. 이래야 일이 빠르다. 그리고 표고와 다시마를 우려 기본 육수를 내 놓는다. 나물을 삶을 때 이 육수에 삶고 채수와 육수가 어울어진 물에 다시 나물을 조려내듯 볶는다. 그러니 나물 서너 가지를 해도 냄비 하나에 한꺼번에 다 한다.


전날 준비한 전 거리는 명절 당일 이른 아침에 부친다. 제일 맛있을 때 부모님 제사상에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전날 부치면 일은 줄겠지만 전이 맛없다. 명절날 당일은 그래서 오히려 전혀 허둥대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


올 명절에는 정말 한가위처럼 마음이 그득하다. 기다릴 손님들이 있고 음식 냄새, 사람 냄새 날 내 식탁이 벌써 고맙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모든 순서와 마음가짐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나에게 5년 동안 밥상머리에서 가르침을 주신 외할아버지의 덕이다.


외할아버지는 늘 밥상머리에서 말씀하셨다. 밥은 허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고. 밥상은 동서남북 오방색처럼 조화로워야 한다고. 때로는 된장국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나는 어린 시절 그 가르침을 흘려듣는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내 삶 깊숙한 곳에서 그 가르침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는다.


명절 준비를 하며 양념 하나하나를 손질하는 마음, 이틀 전부터 재료를 다듬어 놓는 치밀함, 전은 당일 아침에 부쳐야 한다는 고집, 그 모든 습관이 바로 외할아버지의 밥상머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음식을 통해 사람을 맞이하는 법, 음식을 통해 세상을 품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나의 명절 준비는 단순한 살림의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기르는 교육이자 신앙 같은 실천이다. 외할아버지의 그 가르침이 나를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분의 손길을 따라 오늘도 명절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형식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태도를 지켜내야 한다는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오늘도 내 삶을 살고 있다. 깨를 볶고, 김치를 담그고, 전을 부치는 작은 손길 속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살고 있느냐고, 감사할 줄 아느냐고,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느냐고. 외할아버지의 따뜻한 물음이 귓전에서 울려온다. 그 물음에 답하듯 가족이 모두 모여 먹는 둥그런 밥상처럼 올 한 해 명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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