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른 카페는 동네 바닷가 앞에 있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 언젠가 한 번은 가야지 마음만 품고 있던 곳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식사 후 배도 부르고 날도 좋아 들르게 되었다. 카페 이름은 '3인칭 관찰자 시점'. 그 이름에 매료되어 문을 열었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머릿속은 오래전 국어 시간으로 데려가졌다.
그때는 단지 문학작품을 읽기 위한 관점이겠거니 했는데 살아보니 알겠더라. 시점은 삶의 방식이다.
나는 오랜 시간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살았다. 나는 왜 이리 고단한가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는가. 세상의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때론 억울하고 섭섭하고 고립되었다. 나는 늘 중심에 있었고 그만큼 자주 흔들렸다. 주위 사람들도 나를 1인칭의 삶을 사는 게 맞다고 가르쳤고 또 내가 그것을 수용해서 적극적으로 내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삶의 시련들을 하나씩 넘어보니 삶은 꼭 주인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그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삶은 때로 무대에 덩그러니 혼자 퇴장해야 하는 날도 많았고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 속에 있을 때 나는 조용히 뒷켠에서 숨죽이고 다음 장면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 오십이 넘으니 비로소 삶에 대해 견자(見者)가 되는 법을 알았다. 진정으로 1인칭 주인공의 삶이 아닌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삶을 내 관점만이 아닌 타인의 관점으로 한 걸음 물러서 신의 관점 자연의 관점 우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식견이 비로소 흐리게나마 생기게 되었다. 나무가 병들어 버린 건 가까이에서는 모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에서 떨어져 보아야 산 전체가 보이고 나무의 병도 보인다. 삶도 그렇다. 가까이 있을 땐 애정이 집착이 되고 눈물이 진실을 가리고 관계마저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니 삶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선 시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을 살다 보면 누구나 원치 않는 문제와 갈등 그리고 나조차 내 삶을 이해할 수 없어 수없이 매운 밤이 지나쳤을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협소하고 소극적인 해결에 불과했다. 내 시점이 문제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 그 문제 자체를 너무 어둡고 크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사슬을 내 자유의지를 통해 끊었고 더 멀리서 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같은 방식으로 인연을 부르지도 않았고 문제를 파고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내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관점을 바꾸는 순간 문제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와 삶 자체를 관조한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존재와 싸워서 이겨야만 가능한 일이다. 문제 자체에서 나 자신조차 지워야 비로소 신의 눈과 자연의 눈으로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나'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지운다는 것은 적멸에 이르는 수행과도 같다는 것을. 그 아상과 아집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로운 시선이 생기고 삶의 지평도 함께 넓어진다.
삶이 말을 걸어올 때 우리가 우리의 삶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견자가 될 때 우리는 그제야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인생은 결국 나로 출발해서 다시 나에게 닿는 여정이다.
내가 이 카페 이름으로 삶의 요단강을 건너온 세월이 구겨진 원고지처럼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 모든 구김은 나의 문장이었고 지워내려 했던 얼룩들이 오히려 문장을 진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그것들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옳았다는 결론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 정답인지 확신하지 못해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삶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견딤의 미학이며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곧 살아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웃을 수 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이 서사 앞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 삶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제야 병들었던 마음도 보이고 지나온 산맥의 굴곡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