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세상을 느끼는 방법을 조금 달리해 보려 애쓴다. 오감으로 느끼는 일에 한계를 절감한 어느 날 작고도 발칙한 결심을 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귀와 코로 느껴 보고 귀로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상상한 후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을 새로 배우는 학생처럼 조심스럽고도 진지해졌다. 들리지 않는 노래가 귀를 타고 들어오고 보이지 않는 향기가 눈앞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일까 싶었지만 정작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느끼려는 마음은 언제나 더 느리게 움직이고 세밀하게 멈춘다. 그래서 그 느림의 틈으로 바람의 결이 보이고 꽃잎의 숨소리가 들렸다. 마치 오래된 오르골 속에서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음처럼 세상은 그렇게 낮고도 고요한 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렇다고 내 삶이 극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한정된 지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경험의 좁은 틀 안에서 이해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발칙한 시도가 나를 오감 너머의 세계로 조금 밀어 올려 주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는 그 순간 나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 자신이 관찰자의 시선에서 이해자의 시선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랑이란 대상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느끼려는 몸짓이다. 나는 그 사람의 표정과 숨소리 그 사이를 오가며 그가 내는 온도의 변화에 귀를 기울인다.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나만 느껴지는 그 특이한 부분 남들은 보지 못해도 나만 눈물겹게 바라보는 그 결.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매력이라는 코드일 것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뿌리로부터만 타인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지나온 상처의 언어로 상대를 읽고 자신의 고백의 어조로 타인의 삶을 해석한다. 그래서 비슷한 상처를 지닌 이들과 금세 가까워지고 유사한 기억을 가진 이들과 깊은 연대를 느낀다. 결국 이해는 닮음에서 피어나고 공감은 기억의 자리에서 자란다.
그럼에도 나를 이해하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다.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타인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스스로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하면 타인의 삶 또한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피어난다. 나는 그 열망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사랑이란 타인을 내 세계로 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그 세계 속으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그가 본 풍경을 나도 보고 그가 느낀 바람을 함께 맞으며 잠시 그가 되어보는 일이다.
나는 요즘 종종 눈을 감고 세상을 만진다. 귀를 막고 하늘을 바라본다. 새가 지나가며 남긴 공기의 흔적을 어루만지고 바람이 남긴 빈자리에 마음을 대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세상은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까이 와서 속삭인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느낀다는 것은 아는 것보다 오래가고 오래가는 것은 사랑으로 남는다는 것을.
세상을 느낀다는 것은 나를 열고 타인을 열고 마침내 신의 손끝을 느끼는 일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손끝이 나를 쓰다듬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하루를 견딘다. 이해는 짧고 사랑은 깊다.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느끼려 할 때 비로소 마음은 고요해진다.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는 그 시간. 가슴이 뻐근하고 심장이 뜨겁게 뛰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가장 깊이 느끼는 방법이다. 사랑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감각의 마지막 언어다. 나는 오늘도 느끼려 한다. 바람의 속도처럼 천천히. 빛의 여운처럼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