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은 유난히 빛이 하얗게 쏟아지던 계절이었다. 서퍼스파라다이스의 모래는 뜨거웠고 파도는 내 맨발을 부드럽게 핥았다. 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뜨렸고 나는 새로운 집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번엔 꼭 바다 가까이에 살고 싶었다. 창문을 열면 짠내가 스며들고 아침마다 파도소리에 눈을 뜰 수 있는 곳.
그날 어느 건물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회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햇빛이 그의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어 금빛이 번졌다. 그는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집을 구하는 중이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가진 집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웃음은 여름의 온기처럼 부드러웠다. 그날의 공기에는 알 수 없는 예감이 섞여 있었다.
며칠 뒤 나는 혼자 그를 다시 찾아갔다. 6층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였다. 문을 열자 현관 너머로 노을이 번져 들어왔다. 발코니의 커튼이 바람에 젖은 듯 흔들렸다. 오리엔탈풍으로 꾸며진 방은 낯설게도 편안했다. 그는 주스를 내오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은 설명할 수 없는 조용한 강도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괜히 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아꼈다. 밖에서는 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작은 숨결을 냈다.
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성당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생일잔치를 해줄 테니 꼭 오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평범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전화를 걸어왔다. 기타 소리가 들렸고 그 위로 그의 목소리가 흘렀다. 파도와 바람 사이에서 길을 잃은 노래 같았다. 평생 잊지 못할 노래를 선물하고 싶다던 그의 말이 내 귓속 어딘가에 오래 머물렀다.
그날 오후 성당에 그가 나타났다. 꽃다발을 안고 신부님 앞에서 나를 잠시 빌릴 수 있냐고 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를 따라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햇빛 속에 물기 어린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심장이 아직도 내 안에 있다.
그는 해변의 식당을 통째로 비워두었다. 창가에는 Happy Birthday Marie라 적힌 카드가 놓여 있었다. 샴페인을 따르자 작은 거품이 쏟아졌다. 그는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건 분명 운명이야 우리 함께 걸어가면 어떨까.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의 파도를 바라봤다. 그 파도가 대답을 대신해주기를 바랐다.
식당을 나서자 비가 쏟아졌다. 소나기는 폭포처럼 내려왔고 그는 내 손을 잡고 달렸다. 우리는 근처 공원의 미끄럼틀로 뛰어갔다. 그 위에는 작은 지붕이 있었다. 비를 피하기엔 아슬아슬했지만 그곳뿐이었다.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었고 내 원피스는 피부에 엉겨 붙었다. 숨결마다 비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는 젖은 내 머리칼을 살짝 털어주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비보다 따뜻했고 순간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
춤출래 그의 눈빛이 내게 말했다. 나는 샌들을 벗었다. 그도 신발을 벗었다. 우리는 미끄럼틀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맞췄다. 비는 지붕을 두드리며 리듬이 되었고 바람은 선율이 되었다. 우리가 춤춘 것은 음악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우리의 몸에 새겨져 지금도 비가 내리면 깨어난다.
그도 나도 알았다. 이 만남은 예고 없이 온 운명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수업이었다. 나는 그의 눈 안에서 나를 배웠고 그는 내 미소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두 영혼이 서로의 거울이 되어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어졌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오히려 더 깊고 애틋한 사랑을 배워야 했다. 거리는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그리움이 매일의 대화가 되었고 기다림은 새로운 형태의 포옹이 되었다. 그가 없는 날의 하늘은 유난히 낮았고 그가 보내온 편지의 한 줄이 하루를 밝혀주었다. 사랑은 함께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더 선명하게 피어났다.
우리는 둘 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의 언어가 다르고 익숙한 하늘도 달랐지만 외로움의 모양만큼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 공통의 고독이 우리를 묶었다. 같은 이방의 공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누구보다 값지게 이해했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알아보았다. 그에게서 나는 나를 보았고 그는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고독을 알아봐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랑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우리의 사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자랐다. 그러나 결국 그 바다 때문에 멀어졌다. 그는 나를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고 나는 그 나라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그곳에서의 삶을 꿈꾸었고 나는 그곳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쉴 자신이 없었다. 그토록 사랑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하늘 아래 설 수 없었다. 사랑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는데 세계가 우리를 갈라놓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날의 침묵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그 여름의 빗소리는 아직 내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때의 바람 그때의 노을 그때의 그의 눈빛이 지금도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흐른다. 가끔 비가 내리면 나는 창문을 열어 그 빗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 속에는 그가 있고 우리가 있다. 세상은 변했지만 그 여름만은 아직 내 안에서 젖은 채로 남아 있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바꿔 나의 기억 속에서 계절처럼 반복될 뿐이다. 나는 안다. 어떤 사랑은 헤어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여름의 비처럼 잠시 멎었다가도 다시 내리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