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마주하는 것들
하루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돌아눕는 시간 나는 적요와 만난다. 멈짓 놀라 눈을 크게 뜨니 어디선가 배고픈 산짐승이 덜컥 헛기침을 한다. 얼마나 이승과 저승을 오가야 할까. 하루에도 희비가 엇갈리고 감정이란 손님은 문턱도 없이 들락거린다.
밤공기는 축축하고 천장은 낮다. 어둠이 천천히 내 몸에 스민다. 숨이 깊어질수록 고요는 점점 짙어진다. 나는 적요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기쁨도 슬픔도 다 빠져나간 자리, 그 끝에 남은 나를 본다.
감정은 늘 제멋대로다. 손님처럼 온다더니 이젠 식구처럼 눌러앉았다. 문을 닫을 수도 없고 내쫓을 수도 없다. 다만 함께 잠들어야 한다. 꿈결에 흔들리며, 아침이 올 때까지.
살다 보면 마음이 자주 휘어진다. 누구의 말 한마디에 틀어지고 누구의 침묵에 금이 간다. 기쁨은 조용히 식탁 위에서 식어가고, 슬픔은 물잔 속에서 잔잔히 반짝인다. 그렇게 하루는 내 안을 지나가며 흘러간다.
나는 가끔 내 안의 소리를 듣는다. 사라진 이들의 숨결과 남겨진 말들, 오래전에 닫았다고 믿었던 문 너머의 목소리들. 그들은 여전히 내 안을 돌아다닌다. 미안하다는 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 사랑했다는 속삭임. 시간은 그것들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먼 곳으로 옮겨둔다.
용서란 결국 그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닿지 않아도 좋다. 그저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게 용서다. 나는 아직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지만 미움이 사라진 자리에 빛이 스며드는 걸 안다. 그 빛은 따뜻하지 않다. 다만 진실하다.
적요는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지나간 뒤 남는 가장 짙은 순간이다. 소음이 빠져나가고 나면 나의 맥박이 들린다. 생각이 멎고 나면 냄새와 빛의 결이 드러난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산다.
누군가는 이승에서 울고, 누군가는 저승의 문턱에서 미소 짓는다. 나는 그 사이에 있다. 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틈새. 그곳이 내가 숨 쉬는 자리다.
이제 나는 문을 닫지 않는다. 문턱에 앉아 밤의 냄새를 맡는다. 이불 속엔 어제의 후회와 오늘의 다짐이 뒤섞여 있다. 그 어떤 것도 떼어낼 수 없다. 다 나였다. 다 내 삶이었다.
적요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 속 나는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다만 살아 있다.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나는 오늘도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돌아눕는 하루를 견디며, 다시 내일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곧 기도다.
에필로그
적요는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가 아닌 나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이제 나를 감싼다.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나는 안다. 적요는 끝이 아니라, 사랑이 쉬어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