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철저한 인과의 범주다.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될 수 없다. 지혜란 몇만 번의 경험을 지나야 알 수 있는 절 입구의 일주문 같은 것이다.
시간과 통찰의 겹이 겹겹이 쌓이면 마른 천을 힘껏 비틀어 나오는 한 방울의 국물 같은 지혜를 알게 된다. 그 한 방울엔 수많은 날의 눈물과 인내가 녹아 있다. 삶이란 결국 그 한 방울을 얻기 위해 견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지혜의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삶은 이렇듯 고행의 연속인 것 같다. 그러다 그 고행 속에서 알게 되는 행복의 순간을 맞이하면 인간은 또다시 어리석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이 무지로 넘어가는 동안에 악연도 시련도 온다. 그것들은 늘 스승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때로는 상처의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 안의 교만을 부수고 겸손을 가르친다. 그렇게 사람은 다시 배우고 또다시 어리석어진다.
다시 어리석어진다는 것은 그러나 나는 인간의 최대 축복이 아닌가 싶다. 지혜는 머리를 밝히지만 어리석음은 마음을 남겨둔다. 완벽히 아는 순간 세상은 닫히고 모르는 채로 남아 있을 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다시 어리석어져야 한다. 모르고 묻고 흔들리며 그렇게 또 한 번 살아야 한다.
완벽하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인간은 허무하다. 그러나 인간은 늘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을 이기기 위해 생을 산다는 사실을 알 때 인간은 다시 의욕이 넘친다. 지혜는 완성을 향한 길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의 이름이다.
지혜는 그 어리석음을 이겨내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과정일 뿐이다. 지혜는 최종 산물이 아니다. 이 일이 있으니 저 일이 있고 네가 있으니 내가 있는 것과 같다. 세상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흘러가고 그 안에서 인간은 배운다. 그리고 다시 모른다. 그 모름이야말로 지혜가 자라는 자리다.
지혜는 인간이 남긴 발자국 위에 새로 쌓이는 시간의 그림자다. 우리는 그 그림자를 밟으며 조금씩 자신을 이해한다. 세상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그리고 한 생의 끝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지혜란 아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세상을 통째로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앎과 모름 사이에서 인간은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