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번뇌를 끌고 해미를 찾았다.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무거워서, 세상의 속도가 나를 앞질러 가는 느낌이 들어서, 문득 멈추고 싶을 때 일락사의 이름이 떠올랐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 이름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주지 스님과의 인연 산신제로 초대되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그곳의 고요가 나를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해미의 새벽은 늘 안개로 시작되었다. 산 아래 마을의 불빛이 아직 잠든 시간, 일락사 처마 끝으로 새벽 햇살이 스며들며 기와 사이를 적셨다. 법고 소리가 산허리를 타고 흘러들면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고요는 그 진동 속에서도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의 해미를 사랑했다.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고 마음의 소리만 또렷해지는 곳.
그곳의 하루는 느렸다. 한 잎의 바람에도 시간이 흘러가고 한 줄기 연기에도 마음이 머물렀다. 산신각의 문은 매일 같은 속도로 열리고 닫혔지만 그 안의 기도는 날마다 달랐다. 나는 그 고요를 닮고 싶었다. 세속에서 쫓기던 마음이 이곳에선 잠시 멈추었다.
청무스님의 좌종이 울릴 때면 산 전체가 함께 숨을 쉬었다. 쇳소리 같았지만 그건 소리가 아니라 파동이었다. 들을수록 내 안의 거친 먼지가 가라앉았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연민, 함께 앉은 침묵의 온기,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눈부신 고요.
해미에서 나는 사람을 많이 배웠다.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치는 이들, 자신의 몫을 다하며 웃는 얼굴들. 그 평범한 삶의 결에는 깊은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몸짓에서 인간의 존엄을 보았다.
산신제 날, 오색의 번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 그 천의 움직임은 기도였다. 축원의 낭랑한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고 향내와 바람, 종소리가 한데 섞였다. 그날의 해미는 유난히 빛났다. 누군가는 두 손을 모았고 누군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모인 마음들 사이로 햇살이 흘러내렸다. 나는 오래 숨을 고르며 ‘살아 있음’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웠다.
차를 내리던 손끝에도 돌 위를 쓸던 빗자루의 리듬에도 기도가 있었다. 작은 일을 큰 마음으로 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평화의 시작이라는 걸 알았다.
스님들의 대화는 언제나 짧고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보살님, 마음이란 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흘려보내면 모입니다.” 한 스님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의 매듭을 풀었다. 긴 설명보다 짧은 문장이 오래 남았다. 또 다른 스님은 차를 따라주며 미소 지었다. “사람은 누구나 수행 중입니다. 어떤 이는 걷고 있고 어떤 이는 잠시 쉬고 있을 뿐이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짊어진 상처와 두려움도 수행의 일부였다는 것을. 그들의 말은 내 안의 어둠을 비추는 등불 같았다. 스님들은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내 마음을 들었고, 침묵으로 치유했다. 그 대화는 교훈이 아니라 온기였다. 말이 아닌 존재로 전해진 기도였다.
그곳에는 따뜻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보다 시선을 먼저 주었고 묻기보다 들어주었으며 가르치기보다 기다려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순한 형태의 사랑을 보았다. 이름 없는 사랑이었다. 소리 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온기, 그저 머물며 나를 조금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힘. 어쩌면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말로 옮기는 순간 고요가 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침묵으로 기도했고 그 기도는 감사가 되었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그가 보여준 평온이 나의 불안을 얼마나 씻어냈는지, 그가 건넨 미소가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를.
이제 떠날 시간이다. 법고 소리는 멀어지고 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해미의 바람이 내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그곳에서의 날들은 나를 고요하게 만들었다. 떠나야만 머물렀던 자리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해미에서 배웠다.
떠나지만 해미는 내 안에 남아 있다. 좌종의 울림처럼 오래 맴돌며 나를 다시 세상으로 이끌 것이다. 세속의 소란 속에서도 나는 해미에서 배운 고요로 나를 지킬 것이다. 언젠가 다시 바람이 불면 그곳의 번이 또다시 흔들리겠지. 그때 나는 알 것이다. 모든 인연은 끝나지 않고 다만 다른 자리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해미를 떠나며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본다. 기도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는 한 사람의 시간으로부터 한 존재의 평화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