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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반조

by 마르치아


한 생이 저물어갈 때 사람은 빛을 본다. 그 빛은 밖을 향해 있지 않고 안으로 스며든다. 세상을 향해 내던졌던 말과 행동과 욕망의 그림자들이 그때 비로소 제 빛을 되돌려 보내며 마지막의 진실을 비춘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회광반조라 부른다. 빛이 돌아와 자신을 비추는 시간. 삶이 자신을 거둬들이는 찰나. 그리고 그 찰나 속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을 본다.


나는 그 말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회광반조의 빛은 죽음의 언어로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밖으로만 흘러가던 시선이 어느 날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고요를 배우고 고요는 다시 자신을 비춘다. 고요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내 안에서 오래 길을 잃었던 빛이 있었다. 누군가를 향해 내던졌던 사랑의 조각이었고 시간 속에서 식어버린 믿음의 부스러기였다. 그 빛은 한때 눈부셨지만 이제는 기억 속의 먼지처럼 희미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미의 좌종 소리 속에서 그 빛이 다시 돌아왔다. 그것은 눈부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불씨처럼 잔잔한 자비였다. 나는 그 순간 회광반조가 삶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임을 알았다. 그 빛은 나를 꾸짖지도 치유하지도 않았고 다만 내 안의 상처를 그대로 비추며 말없이 머물렀다. 그것이 자비였다. 그것이 회광반조였다.


빛은 늘 밖으로 나가려는 속성을 가졌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빛도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빛은 사라지고 돌아온 빛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긴 기도를 마친 후 자신의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낯설고도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용서한다. 용서한다는 말은 단순히 과거를 잊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는 일이다.


나는 해미의 바람 속에서 그걸 배웠다. 스님들의 침묵은 말보다 깊었고 좌종의 울림은 기도보다 따뜻했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빛을 다시 보았다. 빛은 나를 꾸짖지 않았고 오히려 내 안의 어둠을 품어 안았다. 그것은 내가 나를 용서하는 첫 시간이었고 동시에 나를 처음으로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을 향해 돌아가는 빛을 본다. 그것은 인생의 어느 계절에서든 찾아올 수 있다. 청춘에도, 상실에도, 노년의 고요에도 그 빛은 있다. 그때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이 찾아온다. 모든 것은 돌고 흐르며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다 돌아온다. 그것들이 우리를 완성시킨다.


나는 회광반조를 죽음의 다른 이름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시 살아가기 위한 고백의 순간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아직 남은 사랑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뻗었던 모든 빛이 되돌아와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비출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살았는지를 알게 된다.


회광반조는 어둠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어둠과 화해하는 힘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비추며 함께 머무는 것이다. 그때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둠 덕분에 자신이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모든 어둠이 빛이 되고 모든 빛이 고요로 녹아든다.


언젠가 내 생이 다할 때 그 빛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면 나는 그 빛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그 빛은 나를 심판하지 않고 그저 오래 기다렸다는 듯 품어줄 것이다. 그 품 안에서 나는 다시 아이처럼 웃게 될 것이다. 회광반조 그것은 나의 마지막 숨이 아니라 내가 처음으로 나를 이해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날 나는 깨달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만남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고통은 결국 나를 나로 만드는 빛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빛은 제자리로 돌아와 나를 비추고 나는 그 빛을 따라 고요 속으로 걸어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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