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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 허기(虛氣)라는 감각

by 마르치아







저녁을 일찍 먹고 퇴근해서 풀리지 않은 여독을 뉘었다. 한 시간여 잠들었을까. 추르가 우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TV 화면에는 추르를 위한 유튜브 고양이 영상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추르는 내가 너무 일찍 누워버린 모습이 서운했던 것 같다. 가슴 위로 뛰어올라와 지긋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 눈빛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닮았다.




그 순간 배에서 광풍처럼 허기가 몰려왔다. 가만있자. 저녁을 분명 먹고 들어왔는데 이 허기는 무얼까. 잠시 허기에 마음을 대어보니 그것은 육신의 허기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허기라는 감각이 갑자기 나를 눌러왔다. 요즘은 유난히 삶이 허기롭다. 허기를 쓰다듬으며 추르를 쳐다보았다.





추르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눈빛은 말없이 말했다. 집사야. 네 허기. 나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그 말이 들린 듯 나도 모르게 추르를 왈칵 안아 볼에 입을 맞췄다. 나를 이해해주는 생명체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허기가 조금은 지워졌다. 방 안의 고요 속에서 작고 따뜻한 숨결이 내 마음을 덮었다.



이 허기의 감각을 나는 일으켜 세워 이해해보려 했다. 이 허기가 나에게 알려주는 의미가 무얼까. 아직 누군가 사랑할 힘이 남아 있다. 아직 삶에 대한 뚜렷한 기대가 있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잠시 멈짓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눈물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허기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허기는 이렇듯 삶에 있어 벌컥이다. 잠잠하다. 반복적으로 나를 흔든다.




그러나 허기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도대체 삶의 의욕을 어디서 길어올려야 할까. 허기를 감각한다는 그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때로는 그 허기마저 사치로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정말이지 삶이 지리하도록 아무 변화가 없을 때도 있었다. 내가 이 무게를 얼마나 지탱하고 버텨 나갈 수 있을까. 자괴감이 든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선뜻 허기가 느껴지는 날에는 작은 감사가 피어 오른다.



아홉 살. 나는 엄마와 거의 한 달 이상 굶은 적이 있다. 그때의 삶의 허기는 지금의 허기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사실 그때의 허기는 거의 무감각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굶는 날이 많아질수록 허기는 점점 지워졌다. 내가 굶는다는 사실조차 통각하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나는 배가 고팠지만 배보다 마음이 먼저 얼어붙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저 시간이 멎기를 바랐다. 엄마의 체온이 서서히 식어가던 그 방 안에서 허기는 더 이상 감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끝나지 않는 시간의 다른 이름이었다.




내 허기의 뿌리는 그때의 경험이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허기를 느낀다는 그 자체. 허기를 알아차린다는 그 자체에 감사를 느낀다. 허기를 느낀다는 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그 감각은 나를 다시 사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되돌린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상대의 허기부터 살피게 되었다. 그 사람의 말보다 그 말 사이의 공기를 본다. 배고픔은 때로 고독의 모양으로 피어나고 결핍은 사랑을 찾는 신호처럼 깜박인다. 나는 이제 안다. 허기는 결핍이 아니라 생의 불씨라는 것을. 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것이 슬픔의 문이든 외로움의 그림자든 상관없다. 허기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또 하나의 기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는 은총이다. 오늘도 나는 허기를 품고 누군가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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