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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반조와 각광

by 마르치아


사람이 마지막 죽기 전에 한 번은 얼굴이 빛이 반사된 듯 환하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를 일컬어 화광반조(和光返照)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오히려 흑빛이 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죽음 앞에서의 빛은 늘 고요하고 신비하다고 들었지만, 내가 본 얼굴은 그 모든 믿음을 거부하듯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날의 공기는 무겁고 느렸으며, 창문 밖에서 스며드는 빛마저도 방 안으로 들어오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 빛의 의미를 찾아 헤맸다. 왜 어떤 이는 죽음 앞에서 빛나고, 어떤 이는 빛을 잃는가.


시간이 지나며 나는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빛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빛이 안으로 돌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빛,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간 광명. 그건 사라짐이 아니라 귀환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며 세상의 빛을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화광반조(和光返照).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뜻은 ‘빛을 누그러뜨리고 스스로를 비춘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빛은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진정한 빛은 세상을 밝히기보다, 자기 안을 비추는 순간에 일어난다. 부처의 광명은 드러내는 빛이 아니라 감싸는 빛이다. 모든 존재를 비추되 그 누구도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은 그 빛이 세상으로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되돌아간 얼굴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진정한 화광반조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빛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죽음이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삶 동안 바깥으로 쏟아내던 시선, 말, 열망들이 마지막에는 모두 안으로 회귀한다. 그 안에는 미처 고백하지 못했던 말과 용서하지 못한 마음,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존재들이 얽혀 있다. 어머니의 흑빛은 그 모든 감정의 무게가 응축된 빛이었다. 그것은 사라지는 빛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기에 차마 밖으로 흘러나올 수 없던 깊은 빛이었다.


부처의 광명은 모든 존재를 비추지만, 그 빛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찬란함보다 온화하고, 현란함보다 고요하다. 깨달음은 외부로 뿜어내는 광채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해 되비추는 의식의 순간이다. 어머니의 흑빛은 사라진 빛이 아니라 회귀한 빛이었다. 그 빛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씨였다. 나는 그날 이후 빛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반대로 빛을 밖으로 내보내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각광(脚光)을 받는 순간을 인생의 정점이라 부른다. 각광(脚光)은 원래 무대 아래에서 배우를 비추던 조명의 이름이었다. 배우의 다리 근처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의 빛. 그 빛은 배우의 표정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관객의 시선을 그에게로 모은다. 그렇게 각광은 ‘비추어진 존재’를 상징하게 되었고,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각광(脚光)은 언제나 외부에서 온다. 그것은 남이 켜주는 빛이며, 남이 끄면 사라지는 조명이다. 화광반조(和光返照)가 스스로의 마음을 향한 빛이라면, 각광(脚光)은 타인의 시선을 향한 빛이다. 하나는 고요하고 하나는 소란하다. 하나는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밖으로 번진다. 그러나 두 빛 모두 결국 ‘존재의 확인’이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나는 이제 각광(脚光)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 안에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각광이 켜져 있는 동안은 그 빛을 감사히 받되,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믿지는 않는다. 빛이 꺼지고 무대가 비워질 때 비로소 나의 화광(和光)이 시작된다. 그때의 고요가 나를 가장 명확히 비춘다. 세상이 비추는 각광(脚光) 아래서도 나는 내 안의 화광(和光)을 기억한다.


때로는 각광 속에서도 화광반조(和光返照)는 가능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을 때, 나는 그 시선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다 그 안에서 내 마음의 떨림을 본다. 내 안의 빛이 흔들리는 이유를 들여다본다. 그 순간, 각광(脚光)은 나를 밖으로 드러내는 빛이 아니라 내면을 깨우는 경고가 된다. 나는 각광(脚光)을 통해 다시 화광(和光)으로 돌아간다.


진정한 빛은 외부의 조명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반조의 순간에 있다. 무대 아래에서 나를 비추던 각광(脚光)이 꺼져도, 내 안의 빛은 여전히 반사되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작은 화광반조(和光返照)이며, 세상의 각광(脚光)과는 다른 나의 빛이다. 죽음 앞의 빛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다. 어머니의 흑빛은 어둠이 아니라 회귀였다. 세상의 각광(脚光)이 꺼지고 나면 남는 것은 나를 비추는 내면의 빛이다.


나는 오늘도 그 두 빛 사이에 서 있다. 세상이 내게 비추는 빛과 내가 나를 비추는 빛 사이에서 매일 조금씩 배운다. 때로는 각광(脚光) 속에서도 고요를 지키려 하고, 때로는 고요 속에서도 작게 빛나려 한다. 화광반조(和光返照)는 나를 고요하게 만들고, 각광(脚光)은 나를 세상으로 이끈다. 나는 그 두 빛의 경계에서 산다.


밖의 빛이 꺼져도 내 안의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빛은 내 어머니의 얼굴처럼 조용히 내면으로 돌아가고, 다시 나를 비춘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화광반조(和光返照)이자, 나만의 각광(脚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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